비밀의 수위 by이소
- 글 다락: 사고(思考)뭉치
- 2021. 3. 23. 01:02
이야기 짓는 일을 하는 나에겐 감각하는 모든 것이 창작의 소재가 된다. 예를 들어 장바구니를 들고서 장을 본 하루에 발견한 이야기에는 이런 것이 있다. 프리랜서라 시간을 유동적으로 쓰며 평일 아침에 마트로 향하고 있었는데, 직장인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터나 학교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버스정류장 팻말이 박힌 좁은 길가를 차지하고는 해질녘까지 이어질 피곤한 일과를 맞이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그사이를 지나며 아이러니하게도 이질감과 함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라고 칭하고 싶다) 채우는 시간의 속도와 재질은 다르지만, 어쨌든 각자의 자리에서 늘 그랬듯 아침을 맞이하고 있어서다. 다들 적어도 20년은 넘게 살아왔을 테니 그 삶의 이야기는 많다 못해 흘러넘칠 게 분명하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일만으로도 삶이라는 신비로움의 냄새를 다시금 맡을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로운 일은 매일 있으니, 창작의 소재도 매일 나온다.
나는 보통 나를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나의 가치관을 만화로 표현하기도 하고, 일어났던 사건과 사건에서 얻은 감정이나 깨달음을 글로 쓰기도 하며, 굴곡진 감정을 그림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자의식이 과잉되어 그러는 건 아닐까 우려도 되지만, 어쨌든 창작의 소재는 나다. 그런데 나를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지닌 비밀의 수위를 조절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상대가 가족인지 친구인지 불특정 다수인지에 따라서도 고민이 달라진다. 이런 속내를 꺼냈을 때 이걸 접하는 과연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왜 고민하면서까지 비밀의 수위를 조절하는 작업에 신경을 쓸까. 나를 지켜내기 위함도 큰 이유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내가 나를 빠짐없이 드러내고 싶어 하기에 그런 듯하다.
왜 비밀을 드러내고 싶을까. 첫째로 나 자신을 드러내 세상 앞에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서다. 언젠가 상대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하던 내가, 위선자가 된 기분이 든 적이 있다. 페미니즘에 꽉 막힌 친구에겐 내 의견이나 분노나 슬픔을 감추고 페미니즘에 열린 친구에겐 나의 생각을 검열 없이 공유하며 의견을 주고받은 일이 그것이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침묵했을 뿐인데도 상대에게 거짓 모습을 보이며 속이는 듯해 찜찜했다. 나의 소중한 한 친구는 아마 내가 삶에서 페미니즘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이런 기분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그런 모습도 다 나의 진짜 모습 중 일부이니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진짜 나’라는 존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사실 그냥 여기 있는 내가 나라고 했다. 어떤 말을 내보이는 나도 나고, 어떤 말을 삼키는 나도 나다. 그래서 지금은 다행히 증명에 대한 압박감이 옅어진 상태다.
비밀을 드러내고픈 또 다른 이유는 타인에게 스며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혼자 잘 살아가기를 원해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외치지만 결국 나는 온전히 혼자 살 수 없는 존재 같다. 오히려 나의 흔적을 타인에게 기록하길 원하며 지독하게 나를 드러내고 알리는 듯하다.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하다가도 다른 이가 그 그림을 칭찬하면 언제 괴로웠냐는 듯이 나와 나의 작업물에 대한 가치감을 잔뜩 느끼게 된다. 감염병 탓에 2주 정도 집 안에만 있을 때도 사람을 만나지 못해 몸이 근질거리며 답답했다. 상황이 조금 나아져 사람과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서야 그 답답한 심정이 사라졌다. 혼자이고 싶지만 끊임없이 연결되고 싶은 열망도 동시에 선명하게 있다.
비밀을 드러내며 비밀이란 것을 없애고 싶은 마지막 이유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나로 있고 싶다. 예전에 나는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지각도 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복도 단정히 입는 모범생으로 있기 위해 강박적으로 행동했다. 그 모범이란 답안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마구 자책하며 다시 정확한 답의 테두리 속으로 돌아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사회를 조금씩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 말라 하면 왜 하지 말아야 하나 의문을 먼저 갖게 됐다. 사회가 정해주는 과정이나 답을 따르는 데 무관심해졌으며, 내가 스스로 내 길과 목적지를 결정하고, 내 속도와 모양대로 걸어가고 싶어졌다. 이제는 내가 하고픈 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겐 아직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의식적으로 ‘나는 이것을 원해’ 혹은 ‘나는 이렇게 살 거야’ 하고 되새기고 이런 마음을 세상에 노출하지 않으면 언제 또 다시 수동적인 나로 숨어들거나 되돌아갈지 모르기에,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계속 알리게 된다.
창작활동을 하며 비밀의 수위를 고민하는 일이 번거롭게만 느껴졌는데 이렇게 글로 정리하다 보니, 그 일 또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 듯해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될 듯하다. 비밀이란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내가 변할수록 내 비밀도 달라지고, 내가 모르는 나의 비밀도 새로 생기기 마련이다. 비밀이란 왠지 없애야만 하는 녀석 같았는데 어차피 완전히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고 같이 살아가도 재미가 있을 듯하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텅 빈 종이에 적어 내려갈까. 찰랑찰랑 비밀의 수위를 재가며 나는 오늘도 창작의 소재를 찾으러 일상을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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