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끝장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야 by 이나

 

 

    여느 때처럼 트위터 타임라인을 훑던 중 흥미로운 글을 봤다. 누군가가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그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자신의 성격이나 성향 같은 것으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 트윗 작성자가 상담 선생님께 들은 내용을 옮긴 것으로 보였고, 그간 삶의 지향점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 사실은 병증이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본인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서글퍼하는 것 같았다. 밑으로 달린 댓글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내 경우에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장수가 모든 인류의 디폴트 희망값이어야 하는지, 무엇이 건강하고 무엇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데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다. 배우자에게 당신은 오래 살고 싶냐 물으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며, 넌 설마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냐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난 여전히 오래 살고 싶지 않다, 당장 내일 가더라도(어딜?!?) 미련이 없다고 답했다.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고 약을 먹은 지 올해로 3년째인데, 상담 횟수는 주 1회 방문에서 한 주 건너 방문으로 줄었고 복용약도 점점 줄여 나가고 있어 스스로도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장수를 바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이 나의 호전 여부와 상담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을 보노라니 내 판단이 틀렸나 하고 약간 흔들렸다. 나도 병증을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인가? 이건 다음 상담시간에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건 이런 것이다. 오래 살아봤자 그다지 좋은 꼴을 보지도 못하고(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1 재보궐선거 다음날이다. 하하하), 하루하루 쇠잔해져 가는 몸뚱이를 가누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전에 존엄성을 지키면서 세상을 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랜 지병으로 본인도 보호자도 힘든 총체적 난국을 가까이서 보고 자란 탓이기도 하고, 현행법과 개인적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이것저것 해볼 건 다 해봤다는 생각도 들어서이다(첨언하자면 저는 그닥 배포나 꿈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여라도 엉뚱한 오해는 하지 마시길^^).

    세상은 하루하루 착실히 망해가고 있는데 오래 살면 좋은 점이 뭐가 있을까? 도통 떠오르지 않지만, 만약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자본력은 나로 하여금 고통받는 다수의 현실에 대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이고도 물질적인 거리를 확보해줄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가 아무리 심각해도, 대자연이 아무리 고통에 몸부림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편리한 사고에 갇혀 있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리하여 천천히 침몰하는 지구라는 조난선에서 아마도 일정 기간의 생존율이 '다소간' 보장되겠지. 만약 내가 부와 이타심 둘 다 갖춘 위인이라면 방향이 좀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존 방법에 힘써볼 것 같기도 하다. 난치병 정복을 위해 신약개발에 물질적 지원을 할 수도 있겠고, 자연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에 힘을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름도 오싹한 '지구멸망시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가 끝장나고 있는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객체로서
, 후손을 두지 않음으로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종말에 임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자손이, 나보다 어린 생명들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성년이나 중장년 시기를 오롯이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 꼴이 되는 동안, 먼저 태어나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할망정 기후위기를 오히려 가속시키는 데 일조한 연장자로서의 잘못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이제 소비를 덜 하는 소극적 방법만으로 기후변화를 늦출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서늘한 판결을 내린 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분리수거를 철저히 한다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한다거나 채식 지향을 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극적인 도움이 되진 못하더라도 무언가 노력하고 있다는 마음의 면죄부는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 돼지, 닭 등의 육식이 초래하는 전 지구적 나비효과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해양 생태계의 사정에 대해서 어쩜 그리 무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올 수 있었을까? 대중매체에서 흔히 해양오염으로 만만하게 다루는 소재인 플라스틱 일회용 물품으로 인한 피해는 빙산의 일각일 뿐, 무분별한 수산물 섭취로 인해 먹이사슬이 파괴되고 지구가 병들고 있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적극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상업용 어업의 부수 어획으로 파괴되는 해양 생태계를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정치적이며 소신 있는 경제활동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으며 소비자는 기업이 이윤 추구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악의적인 행위에 제동을 걸기 위한 시발점이자 감시자 위치에 있음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은, 소비자 입장에서 다소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솔직히 말하면 고기맛있다’, ‘몸에 좋다등의 주관적 취향 내지는 느낌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고도의 마케팅으로 인해 세뇌되어온 것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체화하기까지도 심적으로 순탄치 않았다. 내가 모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고통받고 있는지, 내가 무지하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얼마나 편히 살 수 있었는지, 무언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지는 축복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이런 현실에 압도된 나머지 더 우울해질 지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멘탈을 위한답시고 현실을 다시 외면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과연 옳은 일이라는 건 누구의 입장에서 판단된 진실인 것일까? 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두통이 가시질 않는다. 이 모든 혼돈의 카오스 안에서도 분명한 하나의 진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 속 산호초는 죽어가고 있으며 작더라도 꾸준한 노력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작은 희망, 그리고 절망에 압도되지 않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투적이지만 변치 않는 진실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는 것뿐듯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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