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의심도 없이 걷기만 할 수 있지? -KBS 다큐 <차마고도> 시리즈 by 정연
- 글 다락: 사고(思考)뭉치
- 2021. 1. 26. 01:45
일상이 부쩍 어려워진 건 당연했던 것들의 부재 때문이다.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게 된 것부터 카페 테이블에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 없는 것, 밤늦게까지 깔깔대며 술을 마실 수 없는 것. 방호복을 벗지 못하는 의료진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볼멘소리도 안 될 말이지만, 염치없게도 나는 아무럴 것 없었던 일상을 되찾기만 바라고 있었다. 다섯 시면 해가 지고 세상은 오래 깜깜했다. 연말이면 만나던 사람들에게는 건강하자는 인사로 마음을 대신 전했다.
그즈음부터 KBS 명작 다큐 <차마고도> 시리즈를 봤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이란 놀라운 것이라서, 어린 아이로 환생한 고승을 찾아다니는 스님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부터 티베트와 관련된 영상들이 피드에 뜨기 시작했다.
▲ 차마고도를 지나는 마방의 행렬.
차마고도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티벳을 오가며 차와 말을 교역했던 길로, 좁고 험한 탓에 '쥐와 새들만 지나다니는 길'로도 불렸다고 했다. 그 길에서 말을 부려 교역하던 이들을 마방이라 불렀고, 시리즈 첫 편인 <마지막 마방>이 이들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줬다. 돌부리가 많은 산이 이어지는 협곡, 좁은 길로 짐을 진 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강을 건너려 외줄을 타고 사람 하나 말 한 마리씩 옮겨가다 죽거나 다치는 일도 많다고 했다. 그래도 커다란 하늘과 산과 강 안에서 사람과 말들은 줄지어 걸었다.
▲ 오체투지로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
두 번째 편 <순례의 길> 에서도 사람들은 걸었다. 불심이 지극한 티베트인들에게 성지 라싸에 가는 일은 평생에 한 번은 이뤄야 할 꿈이라 했다. 순례자 세 명은 나무 장갑을 끼고 가죽 앞치마를 둘러맨 채 꼬박 육 개월을 오체투지를 하며 걸었다. 박수를 세 번 치고 절을 한 뒤 팔 다리를 쭉 뻗어 바닥에 몸을 붙였다가 다시 일어서길 반복했다. 개울이나 담장이 나타나 절을 할 수 없을 땐 그 폭만큼 미리 절을 하고 도로를, 산길을 계속 걸었다. 어떤 순례자는 다음 생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행을 자처한다고 했고, 큰아들을 잃고 가족 모두가 순례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알고 싶은 건 '어떻게?'였다. 내 가는 길 끝에 라싸가 있음을 어떻게 믿지? 어쩜 의심도 없이 걷기만 할 수 있지? 시리즈는 네 편이 더 이어지지만 사람들이 자꾸 걷는 앞의 두 편을 자주 돌려봤다. 그 사이에도 유튜브의 티베트 영상 추천은 계속됐고, 다른 영상에선 관광지로 개발된 비교적 최근의 라싸를 봤다. 베이징에서 티베트를 잇는 긴 철도가 생겼다고도 했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을 찾아봤으며 티베트 망명 정부가 인도 다람살라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변변한 물리적 저항도 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안타까웠으나, 사람들은 그저 몸을 움직여 가야 할 길을 가고 있었다.
세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도 계속 걷는 일에 대한 그 '어떻게'는 외부인인 내가 감히 이해할 영역이 아니었다. 어쩌면 코로나도 물러가 우리 일상이 돌아오고, 중국의 티베트 탄압이 없어지는 날이 올까.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할 때에도 영상 속 사람들은 걸음을 딛고 차마고도를 건너며 경전을 읽을 것만 같았다. 중국은 결국 티베트를 완전히 점령할 순 없을 거야. 그건 알 수는 없지만 믿음을 걸어볼 만한 일이다. 여기의 세상도 예전처럼 될 수 있을까? 그건 믿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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