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스물아홉
- 뿌리는 밤: 하타라
- 2021. 4. 19. 10:01
스물아홉, 이십구라는 숫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참 늦었다는 말을 들을 법한 그 나이에 나는 다시 일본에 왔다. 처음 일본에 간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교환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돈도, 언어 실력도 없는데 지원했고, 붙었다. 지원자 수도 적었고 타 지원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아 체류하는 동안 매달 생활비도 받을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도 있었지만 일본인 사이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할머니가 고양이를 데리고 살고 있는 일본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때로는, 나가는 출구가 어디냐 물어봤을 뿐인데 이유도 모른 채 역무원에게 무시를 당한 적도 있었다. 또 유학생 친구들끼리 특히 아시아권 친구들과 교내 식당에 들어갈 때면 무대 위 핀 조명을 받듯 온 시선이 우리를 향했던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장학금으로 생활비를 지원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돈이 모자랄 때는 집에서 싸간 우메보시가 들어간 주먹밥 1개가 점심인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괴롭지 않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매일이 불꽃이 터지듯이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한 번 더 일본에 갔다. 사회인으로 간 것이었기에 돈을 벌며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괴로운 일도 많이 겪었고 사람과 인생에 대해 농도 짙은 가르침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20대 중반, 한국에 돌아와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고 어떤 일을 하거나 어느 곳에 가도 다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30대를,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내겠다는 마음 하나로 일본에 건너왔고, 나는 그렇게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이윽고 몇 번의 봄이 지나 다시 봄, 내가 사는 곳은 4월이 되어 벚꽃을 포함한 다양한 꽃들이 한창 피어났고 꽃가루 알레르기와 꽃샘추위가 그늘처럼 뒤에 붙어 나를 포함한 주변인 모두 재채기를 하거나 코에서 나오는 숨에 신기한 소리가 섞여 있거나 하는 아픈 한 달을 보내고 있다. 비슷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일을 하고 거리를 지나며 보게 되는 사람들과 동네의 분위기, 맛있는 케이크 가게의 위치와 파칭코 건물을 지나갈 때마다 느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 돌아오는 월급날마다 풍기는 과하지 않게 들떠 있는 사무실 공기, 그리고 늘어가는 일본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적응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일을 버텨냈다. 직장에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고, 휴일은 휴일대로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내기를 반복. 그러다 보니 어느새 3년이 다 되어간다. 어느 날은 일기에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직장에서 매일 쓰는 볼펜의 심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보고, 집에서 아침 밤으로 바르는 로션과 크림의 남은 양이 천천히, 꾸준히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시간을 느낀다. 지나간 시간을 눈으로 보고 되새긴다. 1분 1초까지도 과거가 되어 기억이 되어버린 나의 시간과 나날을 떠올리며 놀라기도 하고, 나를 칭찬하기도 하며, 잊지 않고 앞으로의 시간을 새것으로 교환해야지 생각하며 내일을 살 준비를 한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가끔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어떤 형태가 되어, 혹은 물건에 반사되어 형태를 드러낼 때, 내가 내 눈으로 그것의 존재를 확실하게 깨달을 때, 그럴 때 정말 마음이 뭉클해진다. 뭉클하다는 말은 보통 감동의 의미이거나 벅차고 설레는 등의 느낌을 담은 말일 듯한데 내가 느낀 뭉클함은 어떤 의미로 슬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슬픔 뒤에 고요하게 존재하는 지나온 나의 시간들과 그 안의 치열함이라 할 수도 있었다. 매일의 감정, 사건들, 차마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고 친구에게도 쉽게 떠들지 못한 일이 있던 밤, 침대 위에서 바라본 천장의 무늬 사이사이에 슬픔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서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고, 지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티던 하루하루였고, 어쩔 때는 책의 한 구절과 영화의 한 장면에 펑펑 울던 밤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들이 지나 다음날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난 이제 또 괜찮아졌어. 조금 더 성장했어. 괜찮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묘한 성취감과 희망에 가득 차 무사히 잠이 들게 되는 것이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나란 존재 밖으로 쏟아낸 것 그리고 내 안에 쌓아둔 것, 그것들이 온전히 나만의 감각이 되어 나는 예전보다 단단해졌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다.
시작은 볼펜 심지를 통한 하나의 깨달음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내 주변의 물건을 관찰하게 되었다. 지나온 시간과 지나가는 시간을 세심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물건 위에 쌓인 먼지와 구멍이 난 양말, 천천히 낡게 변해가는 수건과 티셔츠, 손때 묻은 프라이팬과 점점 친해지는 이 집과 이 동네. 좋아하는 물건과 마음이 편해지는 산책길. 먼 미래는 겁이 나지만 가까운 미래는 신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도 정직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듯 부은 다리와 밤 9시가 되면 서서히 찾아오는 졸음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 사는 게 일상의 반복이라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똑같은 하루는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절대 붙잡을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일분일초를 나는 낭비도, 거짓도 없이 담담하게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애정을 갖고 관찰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사랑하고,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를 좋아할 수 있게 그렇게 또 지내보려 한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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