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때늦은 걱정
- 뿌리는 밤: 하타라
- 2021. 3. 7. 22:50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다가 집 양쪽에 강이 흐르는 곳에 이사를 왔다. 매일 5km 정도를 걷고 뛰고 생각하고 사람을 관찰하기도 하며 2주가 지났다. 바다 근처에서 살 때는 기온 자체가 낮아 잘 껴입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옷차림으로 나가곤 했다. 하지만 강이 있는 도심은 달랐다. 건물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과 예측할 수 없는 기온 변화에 차라리 땀을 흘리는 게 낫겠지 하며 3월이 된 오늘도 두터운 옷을 입고 밖을 나섰다.
원래부터 달리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에 운동장을 반복해서 뛰어 기록을 재는 날이면 늘 이를 의미 없는 짓이라 투덜댔고, 뛰는 걸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매일 뛰고 있다. 현재의 나에게 달리기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며, 나의 건강관리를 위해 꾸준히 하고 있는 유일한 운동이다.
큰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 본가 근처에 있는 대공원에 산책을 갔다가 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내 옆을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들을 보았고, 이 더운 여름에 저 사람들은 어떻게 뛸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따라 해보았다. 그 느낌은 의외로 상쾌했고, 나의 땀과 가팔라지는 숨 등 내 몸의 반응이 반가웠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 사는 집 주변에 있는 강은 바다에 연결된 큰 강으로 달리고 걷기 쉽게 길이 잘 정리되어 있다. 가로등 불이 적당히 밝아 밤에 운동하기에 덜 무섭다. 벤치가 곳곳에 있어 멍 때리기에도 좋다. 강가 주변은 주로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고, 큰 건물로는 시립 병원과 1층 건물로 된 장례식장이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운동하는 사람은 많지는 않다. 다만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하는 멤버는 눈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남자들, 꼭 3명이서 나란히 걷는 아주머니들, 매일은 아니지만 마주칠 때마다 운동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오던 여자분.
그런데 처음 강 주변을 걸었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장례식장에 눈길이 갔다.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세련된 외관에 적절하게 큰 크기의 간판과 불빛, 전자기기들이 있었다. 주차 공간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담한 크기로 보아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매일 그 주변을 지나가며 깨달은 것은, 불이 꺼져있는 날도 있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은 상시 운영되며 사람이 늘 많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날이 있다가도,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한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밖에서 바라볼 뿐인데도 그 안쪽 공기가 차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오늘은 그 앞을 지나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장 불이 켜진 날이 ON이고 꺼진 날이 OFF라면? 불이 들어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반복되는 장면을 떠올린다. 스위치가 켜지고 꺼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은 날이 반복되면서 ‘나 여기 있었어요, 나 이제 가요’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은 그런 날.
우리들의 일상 역시 그런 게 아닐까. 우리의 시간을 하루 단위가 아니라 1주일 단위 1달 단위 1년 단위 10년으로 생각해보았다.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건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순간이 자주 온다. 반면, 커다랗고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시간의 틈이 보인다. 불이 꺼진 시간과 켜진 시간 사이, 그 틈에서 숨을 고를 수 있다. 이윽고 시야가 선명해진다. 정말 슬픈 일도 불이 꺼진 시간 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고 순간의 기쁨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도 불이 켜진 시간 속에 온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많이 슬퍼하지 않아도 돼. 마음껏 기뻐해도 돼. 내가 내 자신에게 읊조리게 되는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켜보니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가 떠 있었다. 오늘은 장례식장 불이 켜져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있지, 왜 없겠어, 이런 우연이 있으면 저런 우연도 있는 거지. 한참을 어떤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이 평생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다면, 저 사람은 저걸 빨리 크게 다 써서 그래서 하늘로 사라졌나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케이크 사진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에 대해 그렇게 골몰하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케이크 사진을 본 뒤로는, 그 케이크가 무엇으로 만든 케이크인지 데코레이션은 어떻게 했는지, 맛은 어떨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런데, 그래서 뭘 어떡해야 했었는지도 모르겠어서 내가 나를 어색해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다 그런 거고 다 그런 식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정말 헤아리긴 했던 걸까? 슬퍼하기는 한 걸까? 갑자기 내 자신이 싫어졌다.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하고 알아주고 당신의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고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들릴지 모르겠지만 잊지 않는 것이 변화의 동력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 그만큼 마음이 혼란스럽다. 어제는 줄곧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불안이 사라져 잠을 잘 잤는데 오늘은 정반대의 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사명이란 걸 가지고 태어난 걸까. 이상한 정의감. 오로지 나를 향한 정의감만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닐까. 나는 모르겠고 그냥 많이 지쳤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생각하는 걸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 굳게 존재하면서 여기에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고 같이 존재한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늦은 걸까. 뒤늦은 후회뿐이다. 살라는 말도, 살아달라는 말도 뭔가 아닌 것 같다. 시간을 갖자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 시간을 갖자고.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그건 곧 너랑 나 모두가 시간을 나눠 가져 보자는 말이다. 결국엔 같이 존재하자는 말이다.
달리기와 일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죽음이 있었다.
생활고는 없었을까, 때늦은 걱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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