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사원 은수, 프리랜서 정수
- 삼 년째 이야기: 정수, 은수(연재 종료)
- 2021. 4. 29. 11:04
바쁜 꿀벌 정수 님께,
정수 님,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쁜 와중에도 며칠 전 실의에 빠진 저를 위로하러 한 걸음에 달려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정수님을 볼 때마다 얼른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다짐하는데 참 쉽지 않네요.
무기력함을 느낀 지 어언 1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아요.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인해 찾았던 병원을 다니는 동안 스스로도 인정했던 것이 번아웃이었는데, 나아지는 듯 아닌 듯 더딘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어요.
현재 근무 중인 회사를 다닌 지도 어언 8년 차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을 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 것 같아요. 처음엔 인턴으로 입사해 1년 후면 재계약이 되지 않을 거란 말에 슬쩍 기뻐하기도 했어요. 저는 호흡이 그리 긴 사람이 아니어서, 아마 1년 정도 지나면 이 일이 질릴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전문적인 자료를 다루고 그것을 다룬 시간만큼 자료와 제 직업 사이에 맥락이 쌓여가는 걸 느끼는 게 좋았어요. 저는 제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회사라는 건 단순히 ‘업무’만 하는 공간이 아니잖아요. 늘 그렇듯 이 곳에서도 ‘사람’으로 인한 문제가 많았어요. 대한민국 회사라면 필수요건 같은 성차별적인 조직문화와 더불어 주요 구성원들의 엘리트 의식이 결합하면서, 전자의 문제를 후자를 빌미로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기가 막힌 집단적 합리화를 이루어내죠. 사실 일이 싫어진 게 아니라, 이곳의 문화를 바꾸는 일에 지쳤어요.
그리고 저는 8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직책이 없어요. 예를 들자면, 주임이라든지 대리 같은 거요. 저는 연차만 쌓여 가는데 다른 직원들은 직책을 달기 시작하면서, 회사로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또 억울하더라고요. 그럼 그게 뭐라고 나는 다르게 대우 받아야 하나 싶은 거예요. 저는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성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턴을 마친 뒤 면접을 보고 6급 계약직으로 채용됐어요. 대다수의 다른 직원들은 5급으로 들어와 이미 주임이 되었죠. 그리고 그 직원들 중 몇몇은 우리 사이에 차별이 없다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그 말은 제게 의문과 상처를 남겨왔어요. 서로가 일하면서 가져야 하는 책임과 업무량에 ‘차이’는 없지만, 저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저의 업무 성과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차별’은 있었는데 말이에요.
여러 가지 이유로 작년 말부터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데, 코로나 시대이다 보니 이조차도 쉽지 않네요. 몇 번째 서류에서 탈락하고 있어요. 이전과 달라진 점은, 최근 회사에 좋아하는 동료들이 생겼다는 거예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요. 비록 우리에게 문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복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친구들 덕분에 여기서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벌고 글을 쓸 수도 있는 시간과 여유를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마 올해 하반기에는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프리랜서 선배로서 정수 님의 조언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네요! 프리랜서의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지, 어떻게 그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요.
궁금한 게 많은 은수 드림
잘 버티고 있는 은수 님께
어제부터 날이 갑자기 더워졌어요. 아침저녁으로도 바람이 부드럽고요. 지금은 좋은데 곧 닥칠 더위가 두렵네요. 여름은 통 정이 안 가요.
최근 감사하게도 일이 연이어 들어와서 한동안 바쁜 시간이 계속되고 있어요. 일을 하다 좀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면, 내가 방심한 순간 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요. 사실 이런 불안감 때문에 조금 버겁기도 해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해야 열심히 한 걸까. 남들은 나보다 더 열심히 할 텐데, 하는 초조함도 사라지질 않네요. 아직 프리랜서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서 그런 거겠죠? 얼마나 일하면 내 작업물에 조금 더 만족할 수 있을지 까마득합니다. 그래도 저 역시 일이 재밌긴 해요. 재미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지친 은수 님이 열심히 노력하고 버티는 걸 옆에서 봐왔던 터라 불합리한 회사 규정이나 은수 님을 지치게 하는 상황이 저도 속상하고 화가 나요. 최근 저도 어쩔 수 없이 사업자를 내야 했는데, 관련 분야 경력이 반드시 요구되는 ‘산업디자인회사’를 등록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세상의 불합리함을 또 한 번 느꼈거든요. 살아갈수록 이런 현실을 더 예민하게 감각하게 되니 더더욱 우울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고 아마추어 시절을 겪고 나서 프로가 되는 건데 아마추어에게 정당한 기회를 주는 일이 점점 사라지고 시작의 순간도 드물어져가는 것 같아요. 사실 그 시작 단계 자체가 주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요. 그래도 열심히 하면 그만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싶어서 계속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얼른 좋은 결과가 나와서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저도 당당해지고 싶고요.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은수 님 곁에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동료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프리랜서는 혼자 일한다고 볼 수 있으니 그 부분이 조금 다르긴 하네요.
전 직장 생활은 처음부터 무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부터 늘 알바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말은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반백수 생활을 오래 했어요. 통상 회사라 할 만한 곳은 딱 한 군데 1년 남짓 다닌 게 다예요. 내가 정말 직장 생활을 못하는 건지 확인하려고 다녔거든요. 생각보다는 덜 힘들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 같아요. 회사를 다니는 동안 안 아프던 곳들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병원을 가도 소용이 없었고요. 근데 그만두니까 귀신같이 다 나았어요.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가 너무 회사에 가기 싫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정신력과 인체의 신비로움을 느꼈어요.(뜬금)
그 이후로 저는, 직장 생활은 내게 안 맞는 게 확실하다고 스스로 결론 내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했죠. ‘안 되면 죽으면 되지 뭐’ 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니 겁이 없어졌나 봐요. 그러고 보니 전 그만두면 되지, 죽으면 되지 같은 생각을 하며 회피형 인간으로 살아왔네요. 그때는 주변에서 항상 혀를 끌끌 차서 내가 인생을 참 대충 사는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꽤 열심히 살았더라고요. 일단 죽고 나서는 욕먹기 싫었거든요. 그 덕에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나 봐요. 그렇다고 원하던 길로 쭉 가진 못했죠. 비참함도 많이 느꼈고요. 그런데 그렇게 길을 찾는 거 같아요. 제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요. 상황과 기회에 따라 스스로도 변해가면서 합리화를 하고 타협도 하고, 포기도 하고 실패도 겪고 조금씩 사소한 성공도 하는, 그런 긴 과정을 거쳤던 거 같아요. 물론 지금도 겪는 중이고 앞으로도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땐 주눅 들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하니까요. 내가 원하는 걸 정하고 내 위치를 제대로 알고 스스로를 믿어야겠죠. 물론 너무 많은 불합리한 상황이 분노를 치밀게 하지만요. 그래도 힘들 때 분명 은수 님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저는 너무 억울충이었어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면서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서러워했거든요. 용기내서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아직도 매번 지금의 일이 끝나면 또 일이 들어올까 걱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은수 님은 뭘 하든 저보다는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은수 님이 가진 게 가득하니까요.
저는 아직 은수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지만 에너지가 솟아날 때의 은수 님이 얼마나 반짝이는지는 알아요. 그래서 다시 기운 차리고 나아갈 때의 순간이 기대된답니다. 충분히 아프고 난 뒤에 튼튼하게 기운내실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언제든 제가 생각나면 연락주세요. 항상 뛰어갈 순 없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더워지기 전에 친구들과 소풍을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말만 많은 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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