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권태기 by 윤
- 글 다락: 사고(思考)뭉치
- 2021. 6. 15. 00:18
나 없는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태어는 났고 어른은 됐는데 내 인생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십대 때에는 다른 사람 인생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고 그들의 삶을 재밌어하거나 동경하고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그것이 마치 내 삶인 것처럼 과하게 몰입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삶은 정작 그 주체에게서 외면당하고 있었다.
서른이 넘으니 이제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크게 감흥이 없다. 누가 어떻게 성공했고 얼마나 행복한지 과시를 해도 관심이 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그 관심이 내 인생을 향하진 않았다.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무엇을 꼭 원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삶은 죽은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아간다.’ 등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이제는 그런 말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자기개발 과잉시대에서 이제 그런 자극이 되는 말들에 마비가 된 것인지, 아님 이제 남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삶의 중심을 잡아가는 상태인 건지 구별이 어렵다. 남의 말에 동요되지는 않지만 딱히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사는 중이다.
인생 권태기란 게 이런 걸까? 2년 전, 지금의 내 나이인 지인과 함께 밥을 먹었었다. 그때 그분은 그 당시 ‘인생 대노잼 시기’라며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재밌는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땐 그 이야기에 공감을 못했는데 지금 내 사정이 2년 전 그분이 했던 말과 똑같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아무것도 안 해도 걱정이 없고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지든지 말든지 내버려두고 있다.
얼마 전, 어렵게 이직했던 회사를 관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도가 어려웠고 입사는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5년간 다른 업종으로 이직하려는 희망을 마음에만 품고 있다가 올해 드디어 이직에 성공을 했지만 그곳에서의 적응이란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삶이 나를 시험하는 건지, 아님 삶이 내가 무엇을 하든 무조건 싫어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퇴사 후에 자책이 깊어졌다. 나는 왜 그럴까, 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이직하고 업종을 바꾸고 또 퇴사하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적응을 못하고 금방 포기하고 엉망진창인 내 인생을 케어하기가 어렵다. 어쩌자고 퇴사를 했는지 퇴사하고 앞으로는 어쩔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떨 땐 진짜로 죽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움찔하기도 하다.
3개월 동안 하루에 5시간 자고 일, 운동만 했다. 운동은 살기 위해 했다. 모니터를 하루 종일 보니 눈은 매일 충혈되어 있었다. 화장과 렌즈를 포기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운동하고 씻은 뒤에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잤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적응을 못했다. 퇴근하고 유튜브를 3시간 이상 보던 이전과는 달리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30분으로 제한됐다. 출퇴근길에도 뉴스를 들었다. 출근을 하면 지난밤에 있었던 해외 뉴스를 정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리포트를 읽으며 온종일 싸우다가, 겨우 요약을 해서 팀장님께 드렸다. 그러면 매번 자괴감이 들고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피드백이 날아들었다. 이곳은 원래 이런 곳인데 내가 부적응자이거나 무능력한가, 하는 생각을 거듭해서 하다가 결국 퇴사를 하게 됐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3개월의 루틴이 어느 정도 몸에 뱄는지 퇴사하고도 회사에서 하던 업무를 계속 이어갔다. 집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러닝을 하고 집에서는 전날 해외 뉴스를 요약하고 리포트를 읽으며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다음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다. 내 인생에 관심이 크게 없지만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는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계속 공부하면서 무언가를 남기면 다시 의욕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다. 어쨌든 삶을 멈추진 않았으니까.
퇴사 후에는 나보다 일찍 관둔 동기와 만나 술을 마셨다. 동기는 나를 위로해주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요약한 리포트는 너무 어려웠고 그곳은 원래 이상한 곳이 맞다고 얘기했다. 잠깐의 위로가 되긴 했다. 하, 잠깐의 위로라니. 나는 지금 그 회사보다 내가 더 이상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란 말인가. 나는 왜 나를 불신하는가. 나를 스스로를 불신하는 인간으로 만든 회사들과 이 사회는 왜 자신에 대한 의심 한 톨도 없이 건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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