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상 by 윤

불량공주 모모코 中

    주말에 오랜만에 친구와 긴 통화를 했다. 멀리 떨어져 지내서 자주 만나기도 어렵고 연락도 매일 하지는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가깝고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라는 걸 아는 그런 사이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 이젠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친구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나 역시 그 친구에게는 숨기는 게 없다. 연락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한 번 통화하면 기본 두 시간은 거뜬히 넘긴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일종의 보고(?) 형식으로 카톡을 하기 때문에 서로의 근황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서로가 다 알고 있는 근황이지만 오랜만에 통화를 할 때엔 최근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웃는다. 이상하게 그 친구와 통화를 하면 편안하고 힐링이 된다. 고등학교 때에는 여럿이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그 당시엔 친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친구와 말도 잘 통하고 웃는 포인트도 잘 맞아서 스스로도 신기해한다. 시기에 따라, 내가 성장함에 따라 주변 사람들과의 케미도 달라지는 것 같다. 어릴 때엔 잘 안 맞던 부분이 어른이 돼서는 잘 맞기도 하고 적당한 거리가 있던 사이도 한없이 가까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관계의 변화가 생긴 건 친구뿐이 아니다. 최근에는 엄마와도 가까워졌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맞벌이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일하실 때에는 바쁘셔서 나와 시간을 많이 못 보냈고 쉬는 날에는 각자 바깥으로 다니느라 나는 또 혼자였다. 요약하자면 두 분 다 가정에 충실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나도 무의식적으로 부모님과는 벽을 쌓게 되었다. 그렇게 벽이 쌓이다 보니 엄마, 아빠는 나에게 대해 모르는 게 점점 많아지셔서 나에 대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듣는 게 일상다반사였고 그럴 때마다 서운함은 물론 적잖은 충격도 함께 받곤 했다. 그러나 난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변한 건 없었다. 학창시절에는 성적표를, 자취할 때에는 주소를 감췄고, 생애 처음으로 수술을 할 때에도, 이직을 했을 때에도 알린 적이 없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엄마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 통해서 내 근황을 들을 때마다 "너는 왜 엄마한테 말을 안 해주니?"라는 말을 하셨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오히려 의아했다. 사실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통상적인 엄마와 딸의 관계는 어떤 건지 몰랐고 대화를 많이 해본 사이가 아니라서 그런지 엄마한테 말을 안 하던 게 나에겐 당연했던 것이다. 엄마는 서운함을 매번 표출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선 나도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켜켜이 쌓여온 서운함이 원망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는 엄마와 데면데면하게(사실 내가 존재를 거의 무시함, 아빠는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무시당하는 중) 지냈다면 20대 때에는 엄마와 미친 듯이 싸웠다. 엄마는 내 원망을 듣기 힘들어하셨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나한테 계속 서운함을 표출하셨다. 그 시기의 엄마와 나의 대화는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엄마는 나에게 서운함을, 나는 엄마에게 원망을 표하며 서로 탓만 하기에 정신없었고 나는 엄마가 연락 오면 미간부터 찌푸렸다.

    그런데 최근엔 엄마와 많이 친해졌다. 엄마도 나에게 상냥해지셨고 나도 엄마에게 서운함과 원망을 지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엄마에게, 어릴 때엔 혼자 외롭게 두고 밖으로만 다녀놓고 이제 본인이 늙고 외로워지니까 가족을 찾는 게 괘씸하다며 쏘아붙였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내게 말했다. 그럼 엄마가 연락을 안 할 테니 네가 연락하고 싶고 서운한 게 풀리면 연락하라고. 이상하게 그 말을 듣자 이제 나도 그만 원망하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마음을 둘러싸고 있던 벽들도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20대 때에는 서로 양보 없이 상대가 먼저 변하기를 바랐는데 엄마가 먼저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니 격렬하게 원망한 후 남은 찌꺼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과정을 겪은 후에는 엄마와의 관계가 매우 훈훈해졌다. 매일 통화를 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엄마도 나를 딸이라는 이유로 당연시하는 언행을 많이 줄이셨고, 나도 엄마의 말을 이제는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지인들과의 관계, 특히 오랜 갈등을 지속해왔던 엄마와의 관계가 풀리니까 일상이 새롭게 느껴지고 감사하는 일도 많아졌다. 최근 몇 년 전 오랜 친구들과의 의절로 힘들어했던 일도 이제는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로 상처가 치유되고 빈자리가 채워져 많이 안정이 됐고, 내 주변에 남은 사람들에 또 한 번 감사하기도 하다. 30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사춘기처럼 불안정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시기를 겪은 덕분에 더 단단해지고 나를 포함하여 내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같다. 이 마음가짐 변치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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