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모임

    나는 20-30대 자살 사별자 여성들을 위한 자조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에 시작해 햇수로는 2년째다. 매달 수요일 저녁의 두 시간을 우리는 서로를 위해 쓴다. 코로나가 심했던 지난 겨울 몇 달간을 빼고는 빠짐없이 진행했으니 시간이 꽤 쌓였다. 모임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가도 예상치 못한 파도를 맞게 되는 주도 있다.

    지난달 모임이 끝나고는 오랜만에 많이 앓았다. 숲에 다녀온 뒤라 마음이 열려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흙냄새를 맡으면서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여행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꿈을 꿔서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오늘 세션이 어땠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죄다 명치께가 아프다고 했다. 한 분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 숨을 잘 못 쉬고 손가락을 뜯었다. 목구멍에서 너울거리는 것들을 토할 듯하다가 다시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모임 끝나고 선생님들과 회의까지 하고 집에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증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갔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떨었다.

    연인이 죽은 레즈비언이 왔다. 내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20일 정도 됐을 때 신점 보러 갔었다고 한다. 무당의 입을 통한 애인이 그의 탓이 아니라고 전해달라고 했댔다. 논현에 신점 보러 갔을 때가 생각났다. 나더러 3년을 못 넘길 거라고 했는데 3년이 다가오지만 살 수 있을 것 같다. 점 보고 라멘을 먹으러 갔는데 거의 다 남겼다. 남아 있는 날들이 무서웠던 것 같다.

    고인이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오면 디테일 조절이 안 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떤 말들을 해야 자기를 찌르지 않고 감정을 따라갈 수 있는 지 인식할 수 없는 시기여서다. 타는 듯한 통증과 무감각이 동시에 몸을 지배한다.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일들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온다. 처음 이야기하는 것들을 말하기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분이, 어렵지만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힘들지는 않기 때문에 이제는 무엇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죽음은 인식 자체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임상심리학에서는 대강 3개월 정도를 현실감각을 찾는 기간으로 본다지만 고인과의 관계, 죽음 이후 시간을 보내는 방식, 성격 등에 따라 죽음의 인식은 무한정 길어지기도 한다. 이 죽음에서는 너의, 저 죽음에서는 나의 애도를 앞세울 수 없어진다. 그는 두 달 동안 한 시간씩도 못 잤다고 했다. 그 끔찍했던 밤들이 생각이 났다. 불에 덴 것 같아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이 울리면 시야가 무너졌었다.

    장례를 치르면서 딱딱하고 차가워진 몸을 마주하는 일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핵심적이다. 그 몸의 촉감이 오래도록 머리를 지배하는 것과 비례한다. 장례 없이 작은 단지가 묻히는 것만 본 사람들, 날아가는 재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속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음모론이 머리를 지배한다. 나만 모르는 어딘가에서 그가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편하다. 죽음이 무엇에 대한 벌인지 추적하면서 시간을 모두 쓴다.

    00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일을 죄다 그만두고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빠를 잃은 조카의 지척에 있고 싶어서라고 했다. 매주 조카가 다니는 학교 앞으로 가서 밥을 먹고 카페도 가고 이야기도 나눈다고. 그 아이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만 준비가 된다면 언제나 사랑이 곁에 있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00는 친구가 써준 편지 이야기를 해줬다. 여러 버전의 유서와 메모가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 친구와는 매번 떡볶이를 먹었는데, 그가 사실 떡볶이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는 걸 장례식장에서 알게 됐다고 한다. 자기를 많이 사랑했었다고 한다. 자기 말에 그렇게 웃어준 사람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건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죽음은 한꺼번에 이해할 수 없고 부재의 조각들로만 실감하게 된다. 더 이상 팔베개를 하지 않고, 다리를 올리고 자는 사람도 없고, 유통기한이 지난 마지막 불닭볶음면을 먹고, 단톡방의 메시지를 아무도 읽지 않고, 전화는 보이스 메시지로 넘어가다 곧 번호가 사라질 것이다.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냄새도 사라진다. 꿈에서는 떠난 이를 붙잡으려고 긴 줄을 선다. 초조한 마음으로 온 동네를 뒤지다가 다시 줄의 맨 끝으로 밀려난다.

    집에 돌아와서 친구와 카톡하면서 모임 이야기를 간단히 했다. 친구는 애인과 헤어지기만 해도 힘든데 애인이 죽으면 어떻게 견디느냐고 했다. 나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살거나 죽거나 할 것이다. 살기로 결정한다면 어려워도 살 수 있다. 나는 고통 속에서 모임에 나오는 사람보다 다음 애인이 생겨서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는 00가 더 걱정된다. 건너 들은 이야기지만, 00는 애인과 헤어져서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주위 친구들이 돌본다고 고생하고 있단다.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고 있을 것 같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좁은 사랑에 갇혀 있다 보면 자기가 받고 있는 사랑에 무감각해진다. 여자들이 사랑하느라고, 그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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