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함과 머리 사냥꾼의 분노

    필리핀 북부에 살고 있는 일롱고트(Ilongot) 부족에게는 ‘머리 사냥(head hunting)’이라는 문화가 있다. 말 그대로 다른 부족 사람의 머리를 사냥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을 죽인 자를 찾아가 목을 베고, 마을 어귀에 매다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를 잘라 전시한다는 무시무시한 행위는 ‘야만인’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인류학자들은 일롱고트인이 머리 사냥을 하는 이유를 제각각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밀림에 사는 작은 부족들이 전쟁을 감당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전쟁이 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상징적인 복수를 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낫다는 것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교환하는, 일종의 교환 경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롱고트의 남자들에게 머리 사냥의 이유를 물으면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들은 비통하기 때문에 사냥을 나간다고 했다. 슬프기 때문에 남의 머리를 자르는 잔인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말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인류학자 부부였던 미셸과 레나토 로잘도가 이 대답을 그저 가볍고, 모호하며, 믿을 수 없는 설명이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머리 사냥을 나가야 할 만큼의 비통함을 레나토 로잘도가 이해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14년이 지난 후였다. 필리핀에서 함께 현지 조사를 하던 중, 미셸이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자 동료였던 미셸을 잃은 레나토는 처음으로 존재를 압도하는 분노를 느꼈다고 쓴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주위의 온 세상이 갑자기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시각적으로나 실제 몸의 느낌으로 위로 들려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략) 나는 이미 눈물도 흘리지 못하면서 북받쳐 흐느끼는 것이 분노의 한 형태임을 알았다.” 분노는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감각이 마비되고 머리가 뿌옇게 변했다. 그제서야 레나토는 가족을 잃은 비통함 때문에 사냥을 나간다는 머리 사냥꾼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의 설명은 가볍고 모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로지 그 화마에 희생되어 본 사람만이 비통함이라는 단어에 새겨진 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의 죽음 이후에 나는 자주 머리 사냥을 나가는 상상을 했다. 내가 자르고 싶은 머리들이 눈 한쪽에 어른거렸다. 누가 그에게 상처를 주었나? 어느 머리를 잘라야 그 상처는 공평한 것이 되나? 돌이켜 보면 정말 이상한 행동인데, 나는 장례식 내내 작은 수첩을 들고 다녔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쓰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적었다. 개중에 정말 도움이 된 기억들은 거의 없었다. 정보를 모은다고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알아볼 수도 없는 글자들을 끄적거리면서 나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 속에 수첩을 숨겨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나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제일 아는 척을 했다. ‘주식을 하는 게 문제였다’거나, ‘어떤 남자와 싸운 것을 알고 있냐’는 말을 들었다.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죽음의 원인을 알고 싶어했다. 단톡방에서 부고를 보고 어쩌다 온 사람이었다. 잔인함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그날 처음 보았다. 속으로 그 사람의 머리를 여러 번 땄다. 

    내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머리 사냥은 격렬할 때도 있었고,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때도 있었다. 상처만 주었던 사람들은 대개 금방 기억에서 사라졌다. 오래 기억에 남아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더 사랑했기 때문에 더 상처를 주고받았던 이들이었다. 동생의 애인이나 부모가 그랬다. 부모와의 문제는 더 복잡했는데, 나와 동생이 같은 부모에게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고, 서로의 상처를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서로를 미워했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모에게 느끼는 분노가 그냥 나의 감정일 뿐인지 아니면 동생을 대신해 느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그 고통은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당에게 가서 집안의 누군가가 자살로 죽었다고 하면 굿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서는 샤머니즘의 세계관 속에서 죽음의 원인을 알려준다. 집안에 누군가가 잘못 들어왔다거나, 날삼재가 겹쳤다거나 하는 식이다. 한국 같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집안에 들고 나는 사람은 여자뿐이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여자의 탓이 된다. 무당에게까지 가지 않아도 그렇다.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려는 사람들의 수첩에는 쉽게 적을 수 있는 이름들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제일 먼저 엄마가 원인 제공자가 되고, 그 다음이 애인이고, 그 다음에 가족들, 빚, 정신병 어쩌고 저쩌고. 모두 다 손가락을 펼치고 분노의 대상을 지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손가락이 쉽게 펴졌다면, 그것은 내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분노가 쉽게 옮겨붙는다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분노가 나를 태우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 정도만 사랑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의 애인이었던 사람을 만났다. 동생과 함께 알던 동아리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동생이 친구들에게 내 욕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내 머리를 사냥하고 싶어 했다. 장례식장에서 우는 나를 보고는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역사를 내게서 보았을지 모른다. 그 사람이 밉지 않았다. 그저 분노가 나를 삼켰듯, 그 사람도 삼켰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그 분노를 확인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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