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으로서의 위로


    전 애인과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엄마가 느닷없이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기 전부터 엄마는 그가 내게 너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모른 척해왔으나, 무언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못마땅함의 정체가 추접스러운 호모포비아일 것이 걱정되었던 나는 딱히 왜인지 묻지 않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와 헤어지고도 몇 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갑자기 그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이름 다음에 듣게 된 이야기는 당혹보다도 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전 애인은 내가 동생을 자살로 잃은 직후부터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내가 자취방을 청산하지 않고 가족들이 함께 사는 집으로부터 도망쳐 쉴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고, 고통에 질려 팽팽하게 당겨진 내 신경줄을 감당해 내었다. 부모님과 살고 있는 집에 그는 자주 찾아왔다. 
    집은 동굴 같았다. 암막 커튼이 항상 내려가 있었다. 공기가 잘 흐르지 않았다. 슬픔을 마비시킬 정도의 고통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문고리를 잡기 전에 심호흡을 하곤 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자고 싶어 했고 나는 그 손아귀가 무서우면서도 뿌리칠 방법을 알지 못해 경직된 상태로 밤을 견뎠다. 
    그런 공간에 손님이 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워낙에 어릴 때부터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 손님이 용감하게 나 대신 엄마의 손을 잡고 무언가 속삭이는 시간이 내게는 잠깐의 휴식이었고 안도였다. 두 사람이 거실 바닥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엄마의 고통이 언어화될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여전히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 반응에서 실제보다 더 삶의 흔적을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또 다른 죽음이 올까 봐 초조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느라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는 바로 그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자살 충동을 느꼈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내게도 그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으므로 나는 그가 몇 살 때, 어떤 방식으로 여섯 번의 자살 충동을 실행에 옮기고 이겨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 엄마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내 동생을 이해한다고 했다. 이해….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동생을 사랑했던 모두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지나친 고통이 감정을 막아버리면 으레 그렇게 하듯, 죽음을 이해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나가지 않았고, 먹지 않았으며, 생각만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료를 모으고, 논문을 읽고, 일기를 읽고, 글씨체와 그림을 분석했다.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죽음이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뿐이었다. 내 동생과 내가 가진 수많은 공통점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들, 서로에게까지 철저히 숨겨 죽음이 노출시킨 상처들을 통해서만 알게 된 그 비밀들로부터 나를 분리하기 위해 나는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엄마의 속은 헤아리기가 더 힘들었다. 가슴 속에 고름이 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OO를 이해한다더라.”고 말하는 엄마의 눈빛에서 내가 읽은 것은 경멸이기도 하고 격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가 입을 벌리는 것을 보았다. 죽음으로부터 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동안 서로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척해왔던 그 상처였다. 처음과 같았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엄마의 눈 앞머리는 길게 찢어진지 오래였다. 고름이 눈가에 매달려 있었다. 눈물이 피부를 마모시킨 자국이었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자조모임을 진행하다 보면 참여자들이 격분하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주로 무지를 숨기지 않으며 무례한 태도로 죽음에 관해 물어오거나 조언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악의는 피부로 감각할 수 있다. 모임에 온 사람들은 대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 말들이 왜 무례하거나 아픈지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그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무례한 말 그 자체보다, 그 말들에 노출된 연약한 피부에 관해 생각하고는 한다. 피 흘리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냥 공기도 아프다. 그래서 위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행위다. 무슨 말을 해도 상처의 크기에 비하면 부적절하고, 어떻게 해도 완전히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대게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라는 겸손한 단서를 붙여 고통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위로하는 자신의 자아도 보호한다. 단순한 접촉도 화상처럼 느끼는 사람에게서는 떨어져 있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강을 건너 위로를 시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실패하고, 그래서 수치라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했다는 수치, 걸치고 있는 것을 모두 벗어 내 살갗도 너의 것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수치. 때로는 그 실패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수치심만큼이나 아픈 경멸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엄마의 눈에 서린 분노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전 애인과 내가 주고받은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고 싶어 하지 않는 선을 넘어 너무 깊이 아픈 곳에 닿아야 했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창문이 달린 집에 들어왔었다. 나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던 고통의 결계 같은 것을 넘으려다 실패한 흔적은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도 계속 남아있다. 돌이켜 보면 온몸으로 부딪혀 오는 사람이 주는 상처에 나도 마음을 계속 열고 있었다. 어떤 때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덩이를 탈출하면 그가 다시 나를 차 밀어 넣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간절하게 스스로를 펼쳐 보였다. 상처받는 방식으로 밖에 연결될 수 없었던 시기였다. 진심으로 건넨 말이 상대의 지독한 고통 속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만큼이나, 사랑에서 비롯된 위로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일 또한 수치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수치라는 위험에 기꺼이 노출되었었다. 
    때로 사랑은 난폭하게 찾아오지만 난폭한 것이 곧 사랑은 아니다. 모든 침입이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위로는 오로지 침입의 형태로만 온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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