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외롭지 않게


    지난 연재분에서 나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썼다. 친구의 가족사와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목격자로서 나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감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발행 전 친구에게 동의를 구해야 했다. 떨면서 카톡을 했다. 일단 내가 자살 사별과 애도에 관련된 내용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친구에게 말하고(나는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에게만 이 연재의 존재를 알렸다.) 그 에세이에 본인의 이야기를 싣고 싶다고 제안해야 했다. 그 글에는 내가 차마 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들어가 있었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초조하게 이 일 저 일을 꺼내 들다 말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먼저 흔쾌히 글을 발행해도 좋다고 허락해줬고, 한 문장을 빼달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수정이 필요할 거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친구 본인이 아니라 가족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나는 첫 번째 연재 글에서 자조모임에 참여한 네 사람의 이야기를 썼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도 몇몇 부분의 삭제를 요청받았었는데 마찬가지로 글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문장들이었다. 나는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을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리고 이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고통받은 여자들은 강하다. 자신이 아픈 것을 곧잘 참는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발휘되지 않는 섬세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핀다. 나는 그들의 예민한 레이더가 걸러내는 단어들에 한 번, 걸러진 부분들이 암시하는 사랑에 또 한 번 놀랐었다. 

    친구는 글에 등장하는 2년 전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많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2년 전 그는 “이상한 억울함과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억울함이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이 내게만 일어났을까’와 같은 감정이라면, 우월감은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고통은 나만 견딜 수 있는 것이다’와 같은 생각이다. 물론 고통을 독점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독점되는 것이다. 나눈다고 반이 되지 않는 감정이다. 말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다. 독점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는 것. 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월감을 주는 것. 하등 쓸모 없는 손 안의 연탄. 우월감은 고통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실은 고통이 주는 고립감을 정확히 묘사한다. 그런데 그는 이 우월감에서 점차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동생의 죽음이 그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려 했다. 자살 사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범죄 피해자와 사별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사건은 어딘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고통이 경감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내 고통을 이해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친구가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고립이었다. 동생의 죽음과 이후 사람들의 잔인함을 겪으면서 느낀 고통은 그대로지만, 그 고통 속에 혼자 있다는 지독한 외로움과 공허함은 덜어질 수 있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다 해도 꼭 외롭지는 않아도 된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쪽>에 연재한 여섯 번의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결국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아파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동생이 죽은 이후 지난 3년간 나는 가장 상투적인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정말 가슴에서 피가 났고, 다른 죽음들을 말리느라 온몸이 재가 되어버렸다. 요가 도중 다운독 자세를 할 때면 엉킨 오물이 목구멍을 밀고 나오는 것 같았고 혼자 있을 때는 가슴 부근에 주사 바늘을 넣어서 고름 빼는 흉내를 내는 짓도 했다. 이렇게 적는 것만으로도 나는 수치스럽다.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한 일들 중에 여기에 적지 못할 일들은 더 많다. 그래도 어쨌든 나아졌다.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라 내가 타게 두었기 때문에, 열심히 태웠기 때문에 나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스스로를 재가 된 사람으로 상상하는 동안의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곱씹는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를 이해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꺼내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기다려준 사람들도 있었다. 슬픔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슬픔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삼 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슬픔을 건너는 데 함께해준 웹진 <쪽>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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