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작은 약속

    직업이 바뀌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첫 출근을 하기 전에 기상 연습이라도 해둘까 싶었지만 역시 인생은 실전이지, 하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출근 전날을 맞았다. 정작 그날이 되자 나는 새벽 총 4번에 걸쳐 눈을 번쩍 뜨며 실제 수면 시간이 3시간밖에 안 되어 무거워진 몸으로 어렵게 침대를 벗어났다. 몇 주가 흐른 지금은 주말이 되면 같은 시간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일어나지는 않고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더 수면을 취한다. 호기롭게, 눈뜬 바로 그 시간에 일어난 적이 있기도 했지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반수면 상태에서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기상 후에는 비가 어마무시하게 내리지 않는 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연다. 직업이 바뀜과 동시에 이사도 하였는데 지금 집은 저층이지만 창이 넓어 들어오는 공기의 양이 달라 쾌적한 방 환경은 물론 기분에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빨래를 돌린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를 돌리고 가벼운 아침을 먹는다. 물론 이 모든 일과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는 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필수 요소이다. 이 루틴이 자리 잡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피곤하니까, 혹은 귀찮으니까,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내 자신을 위한 거니까 등의 이유로 많은 아침 시간을 뒤로했다. 그러나 일이 아주 조금 적응이 되자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졌고 이른 새벽부터 천천히 그리고 느긋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야말로 내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전에 하던 일은 비규칙적이고 비일상적인 작업이 많은 일이었다. 그래서 일어나는 시간과 잠이 드는 시간이 매일 달랐다. 주말에는 무조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아 늘 혼자서 거리를 탐방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규칙적인 수면시간과 기상시간을 가져보니 정해진 일을 정해진 시간에 함으로써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침착해질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가까운 미래가 예측 가능하니 계획이란 것을 세울 수가 있고, 일의 양을 가늠할 수 있다 보니 어디까지 힘을 내면 되는지 계산이 가능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가 있다. 물론, 정사원이 아닌 계약 사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의 부담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은 물론, 시급이 높지 않고 보너스를 받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흔히 말로만 듣던 ‘일상의 루틴’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나의 정신건강에 이렇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일상 속 먹고 자는 생활에 관련된 루틴 말고도 멘탈에 관련된 루틴 또한 만들어 나가는 중인데, 그중 한 가지가 ‘감정에 솔직해지기’이다. 주로 직장에서 이 루틴을 꼭 지키려고 한다.
    일본에서 맨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한국인 사원이나 외국인 선배가 없어 혼자서 회사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일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외국인 고용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윗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해내고 싶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좋아하지 않는데도 좋아한다고 대답하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잘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저 주변인의 반응을 따라서 하곤 했다. 그들이 웃으면 웃었고 그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으면 나 또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때로 중국인 손님의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레 한국 이야기를 하게 된 날은 마음이 더 괴로웠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도 마찬가지면서 왜 사과를 원하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수인 그들 앞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또 대화의 흐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 내가 내뱉은 솔직한 대답 후에 돌아올 반응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빈번히 나를 속이고 그들의 비위를 맞췄다.
    결국 시간이 지나자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사람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 사람과의 대화를 피했다. 마음이 어둡고 한숨이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좋지 않은 일로 가득한 시기였지만 심리 상태가 여러 번 바닥을 친 후에 끝내 헤쳐 나올 수 있었던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채우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일상을 나만의 온전한 취향으로 채우며 늘 주변을 향해있던 시선을 내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자 내면이 단단해짐을 느꼈고 한 가지 깨달음도 얻었다. ‘굳이’ 동의하지 않아도 되고 ‘일부러’ 티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그런가 보다’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애당초 남과 나는 다르다. 다른 게 당연한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선택된 것과 선택한 것 그 모든 것이 다르고, 다른 채 시간이 쌓여가 지금의 모습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난 것이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해 보일 순 있어도 완전히 동일한 건 없다.
    이 마음 하나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살기가 편해졌다. 상대가 좋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 룰과 상식적인 것, 가치관 등 지켜야 하는 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상 루틴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생뚱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매일 매 순간 타인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내가 나를 지켜내지 않으면 진정 내 것이 무엇인지 늘 속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고개를 들어보니 모르는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아진 사람처럼 마음이 동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침을 먹고 저녁 산책을 하는 그런 루틴처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감정에 솔직해지기’ 또한 일상 루틴으로서 지키고 있다. 이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작은 약속이다.
    직장과 집, 만나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 주변의 소음, 길고양이의 얼굴 등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었다. 긴 계획을 세우자니 한숨도 길다. 우선은 겨우 얻어낸 소중한 일상 루틴을 지켜내 보려고 한다. 이 작은 약속을 한번 제대로 실행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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