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2. 자라는 것과 다 자란 것의 경계에서


    엄마, 엄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그날 걸레질하는 엄마의 굽은 등을 보고는 절대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마치 노을 지는 언덕 같은 엄마의 등. 눈물이 많은 엄마는 그날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렸죠. 그 눈물이 마치 나를 찌르는 빗방울들 같아서 엄마에게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네요.

    엄마는 고등학생인 제 머리를 빗겨주고 제 양말을 신겨주곤 해요. 아침에 비몽사몽인 제 입에 김에 싼 밥을 하나씩 물려주죠. 마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요. 저는 눈을 반쯤만 뜬 채로 김밥을 받아먹었어요.

    엄마 눈에 저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어린아이예요. 제 방 침대에는 분홍색 캐노피가 걸려 있어요. 제 방 벽지는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죠. 여전히 강아지인 나. 아마도 엄마는 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지만 엄마, 엄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못할 거 같아요.

    밤은 언제나 저의 시간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습한 밤공기 사이를 헤집으며 길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죠. 혹은 아무도 없는 방 한구석에서 노래를 만들었어요. 아무도 없는 그곳들에서 저는 자유로웠어요. 더는 아무것도 숨기거나 흉내 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 외의 시간엔 전부 무언가를 숨기거나 흉내 내야 해요. 전 아이가 되거나 혹은 어른이 되어야 했죠. 아이인 저를 숨기거나 어른인 저를 숨기면서요. 어른을 흉내 내거나 아이를 흉내 내야 해요.

    아이이자 어른인 제 경계선은 핑킹가위로 자른 듯이 지글거려요. 밖으로, 안으로 거칠게 뻗어있죠. 나를 상처 주기도, 남을 상처 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무서워서 저는 대부분의 시간에 꽁꽁 숨어있어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요.

    아무도 저를 모를 거예요. 제 안의 이 징그러운 벌레들을. 벌레들은 제 자궁 안에 가득 차 있어요. 가끔 꿈틀댈 때면 속이 울렁거리곤 해요. 밥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다 게워낼 때도 있었어요.

    배가 고프네요. 뭘 좀 먹어야겠어요. 제 방 서랍 속에 있는 소주와 함께요.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소주예요. 가게 주인은 제 나이가 의심스러웠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주 한 병을 내주었어요. 술에 무척 약한 저는 두 모금이면 충분히 취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한 병이면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죠.

    라면을 끓여왔어요. 모두가 잠든 집, 부엌에서 몰래요. 아 몰래 하는 짓들. 익숙하면서도 짜릿하고, 불쾌하면서도 통쾌해요. 조금은 지겹기도 하고요. 아, 제가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몰래 하지 않아도 될까요. 이 모든 일이 몰래 하는 일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몰래 한 짓이에요. 3년 전의 일이네요. 몰래 한 짓인지, 아무도 모르게 겪은 일인지,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했을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똑같은 짓을 몰래 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제 자궁 속에 벌레를 집어넣는 일이에요. 길쭉하고 미끈거리는 벌레는 제 몸속을 헤집고 다녀요. 아이는 할 수 없는 짓이에요. 어른만 할 수 있는 짓이죠. 제가 어른이 된다면 제 몸속의 벌레들은 더는 벌레가 아니게 될 수 있을까요. 더럽고 추악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 짓으로 인해 저는 영원히 더럽혀진 채 남겨질 거예요.

    지나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요? 그날 그 이후로 저는 시간을 돌리고만 싶었어요. 다시 그 자리에 내가 누워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텐데. 그 문의 손잡이를 거칠게 돌려 그 자리를 뛰쳐나왔을 텐데.

    그 이전의 시간이 그리워요. 그날 이후로 제 세상은 한 톤 더 어두워졌어요. 제가 원했던 일인데, 왜 그런 걸까요. 모르겠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럴 때는 마치 아이가 된 것만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저는 여전히 이곳에 숨어 있어요. 거기 누구 없나요? 누군가 있다면 제발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너무 두렵고 불안해요. 이곳은 춥고 텅 비어 있어요. 바들바들 떠는 제 온몸은 핑킹가위로 자른 듯이 지글거려요.

    그러나 다치는 걸 감수하고 저를 안아줄 사람은 없겠죠. 그건 누구라도 힘들 거예요. 저조차도 거울을 보는 게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인걸요. 알아요, 이해해요. 그럼요, 그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저는 제 마음은…….

    저는 당신을 이해함으로써 제 외로움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저는 더 외로워요. 제 마음은 당신으로 가득 차 있어요. 엄마, 나는 엄마를 이해해요. 말 잘 듣던 딸이 어느새 이렇게 커버린 것은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까요.

    열한 살 때 일을 기억해요. 제가 엄마를 따라 목욕탕을 가지 않겠다고 하자 엄마는 엉엉 울어버렸어요. 아마 제가 처음으로 한 반항이었을 거예요. 눈물이 많은 엄마. 엄마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라 울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같아요.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금만 엄마 뜻대로 되지 않아도 눈물을 터뜨리곤 하니까요.

    엄마, 저라서 미안해요. 엄마를 늘 울게 하는 딸이라서 미안해요. 어쩌면 저는 앞으로도 엄마를 평생 울게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안해요. 엄마가 밉지 않아요.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반항할 때도 있지만 한순간도 엄마가 미웠던 적은 없어요. 엄마도 사람인걸요. 엄마도 사람인걸요.

    엄마, 저는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려요. 저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저는 한 마리의 벌레인 것 같아요. 가장 더러운 곳으로 기어 들어가서 제 온몸에 오물을 묻혀요. 이제 익숙해요, 이곳이. 오물투성이인 이 더러운 동굴이 이제는 익숙해요.

    저랑 같이 온몸에 오물을 묻힐 사람은 없겠죠. 저는 철저히 외로운 사람이 될 거예요.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냥 여기서 끝내도 되지 않을까요? 창가의 피아노 위에 이제 올라서도 되지 않을까요? 더는 외롭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아, 그렇지만, 제가 모든 일을 끝낸다면 엄마는 아마 울음으로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 울음 속에 빠져버린 사람이 될 거예요. 어쩌면 엄마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지도 몰라요. 눈물 속에서 숨이 막혀 질식한 채로 축 처져버린 엄마가 떠올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럴 수는. 가여운 엄마. 엄마를 가엾게 만드는 나. 미운 나. 더러운 나. 오물투성이의 나. 일말의 동정조차 받을 필요 없는 나. 지독하게 외로워도 싼 나. 추악한 나.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은 나.

    엄마, 엄마의 눈물을 마르게 할 순 없지만, 엄마를 울음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꾹 참을게요. 꾹 참고 두 발을 땅 위에 디뎌볼게요. 벌레로 살아도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엄마. 그러니까, 날 사랑해줘요. 엄마에게 안기진 못하더라도 엄마의 눈길을 계속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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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쓴 나는 자주 가는 문학 카페에 글을 올렸다. 댓글이 꽤 여러 개 달렸다. 그중 단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카프리님의 댓글이었다. 일대일 채팅을 봐달라는 댓글. 카프리님이 내게 일대일 채팅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채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전적 이야기냐는 질문과 함께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평소에 카프리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나는 그 대화가 마치 꿈만 같았다.

    우리는 그 주 주말에 만났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내가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예견된 일이었다. 우리는 어느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미디움레어의 잘 익혀진 고기를 썰자 빨간 육즙이 베어 나왔다. 아주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우리는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쉽게도 말을 놓았다. 이미 40대는 훌쩍 넘긴 듯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내게 걱정과 위로를 보내는 그의 따뜻함에 마음이 녹기도 하고 다소 무례한 그의 질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아마도 카페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가 날 데려간 곳은 어느 모텔이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랬구나. 카프리님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아, 그렇구나. 나는 역시 어쩔 수 없구나. 수없이 겪었지만 나는 또 바보같이. 바보같이. 역시 그랬구나. 똑같구나. 다들 그런 거구나. 세상은 이렇구나. 나는 오늘도 이렇구나.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더운 날이었고 여느 때처럼 오늘도 예견된 날이었다. 나의 세상은 3년 동안 이런 색깔이었다. 특별할 것도, 놀랄 것도 없었다. 그저 동굴 속에서 온몸에 오물을 묻히는 나는 오늘도 역시나였다.

    그렇게 나는 또 오늘, 내 안에 벌레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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