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1.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 경계: 위단비(출판)
- 2021. 7. 9. 09:55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생각했다. 자신은 하늘에도 땅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는 늘 외로웠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이 외줄 위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그도 딱 한 번 외로움을 잊었던 순간이 있었다. 더는 양팔을 휘젓지 않아도 걸을 수 있었던 순간. 그 순간이 끝나고 그는 땅으로 스스로 떨어졌다고 한다.
여기, 외줄을 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땅으로 떨어지기보다는 스스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카페에 간다. 비틀거리기보다는 안전하게 두 발을 땅에 내디딜 수 있도록 양팔을 힘껏 휘적였다. 키보드 위를 휘젓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상철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효선이었다. 아마도 효선도 상철과 같은 목적으로 카페를 찾은 모양이다. 상철과 효선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상철이 이 카페를 자주 찾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커피 맛도 별로고 의자도 불편했지만 잘 갖춰진 흡연 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잠시 일에서 벗어나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너 요즘 개인 작업한다는 말은 들었던 거 같아. 어때? 좀 잘 돼가?”
“어, 뭐, 똑같지, 뭐. 효선이 너는 요즘 뭐하고 지내?”
“나는 프리랜서처럼 외주 작업도 하고, 강습도 다니고. 그렇지 뭐.”
“그럼 계속 글 쓰는 거야? 글 가르치기도 하고?”
“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이거 말고 뭘 하겠어?”
아, 나와는 같지만 다른 길. 상철은 생각했다. 어쩌면 효선은 이미 적당한 때를 만난 게 아닐까, 하고. 어쩌면 이미 무엇인가가 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찾아온 것은 부러움이었다. 기다림이 허무해지는 순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지는 순간이었다.
“부럽다.”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 말이었다. 효선은 놀란 눈을 하고 상철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상철로부터, 그러니까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로부터 부럽다는 솔직한 말을 들었을 때 응당 나오는 반응일 테다. 사람들은 보통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니까. 상철의 마음을 알 것 같았지만 효선은 내심 모른척하며 말을 이어갔다.
“부럽다고?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네가 처음이다. 수입도 쥐꼬리만 하지, 여기저기 치이기만 하지. 부럽기는 뭐가 부러워.”
알면서도 괜히 하는 말이었다. 상철도 그 마음을 모를 리는 없었다. 애초에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부럽다. 상철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상철은 대답하지 않았고 효선은 말을 이어갔다.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지 뭐.”
효선의 그 말이 상철에게 무심하게 다가왔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잠시간의 침묵. 상철은 곧 자신의 반응이 날카로웠음을 깨달았지만, 철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풀고 싶었던 효선은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상철은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걸까, 아니면 하고 싶은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될 수 있는 것보다는 되고 싶은 것에 그저 매달려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뻔한 의구심. 숨 쉬듯 찾아오는 의문. 그는 차라리 숨을 멈춰버리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속으로만 삼키던 생각이었다. 상철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했을 순간이라고도 생각했다.
그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상철은 그때마다 숨을 멈추는 것을 선택했으나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외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서일까, 점심으로 먹은 김밥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오늘 이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상철은 입을 떼려고 했으나, 효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효선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10분가량 안에 전부 말할 수 있는 짤막한 이야기였는데, 효선 또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상철에게 충분한 답이 되어주었다.
상철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글이 완성되자 상철은 자신의 sns에 글을 게시했고 곧 그 글은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상철은 누군가가 되었을까. 아니면 되지 않았을까. 바라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상철의 글 안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상철이 sns에 게시한 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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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미래는 땅 위에 없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허공을 헤집으며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잡히지 않는 것을 그리는 이는 불안하다. 그리고 외롭다.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않으니 지금을 감각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의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감각의 결여. 감각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과 외로움은 나를 집어삼킬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더욱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그리는 미래가 현재가 된다면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내가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본다면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의 2/3, 아니 3/4를 지나쳐온 지점이라도 괜찮았다. 죽기 전에 기회가 나를 찾아와서 내가 꿈꾸는 모습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럼 나는 죽기 전에 편안하게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최근에 뒤바뀌었다. 삶을 일직선상에서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나는 인생의 1/3가량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직선상일 때 나올 수 있는 수치이기 때문에. 삶을 직선상에서 보지 않게 되자 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오직 그것만이 남았다. 죽기 전의 내가 편안히 눈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잠자리에서 편히 눈을 감는지였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나를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서 있는 나를. 나는 이제 무언가가 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내가 무엇인지 느낄 뿐이다. 이렇게 관점이 바뀌게 된 데에는 내 친구에게서 들은 어떤 이야기의 영향이 컸다.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로부터 시작된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고 물과 땅의 구분이 없던 시절. 신은 자신을 꼭 빼닮은 아이 둘을 낳았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선택했다. 한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변이라 정했고, 한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정이라 선택했다. 변과 정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변과 정은 자라면서 자신의 모습을 선택했다. 그렇게 변과 정은 각자 다른 성별이 되었다. 신은 그 모든 선택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변은 늘 변화했다. 어제가 없었던 듯이 웃었고 앞날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듯 울었다. 정은 그에 비해 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표정은 늘 같았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변의 영역에는 뜨거운 용암과 파도가 늘 넘쳐흘렀다. 정의 영역은 그에 비해 언제나 고요한 바위산이 그 자리를 버티고 서 있었다. 신은 그 모습 또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변과 정의 사이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 아이들은 변과 정의 모습을 조금씩 빼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변의 땅과 정의 땅 중 한 군데를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변의 땅을 선택한 아이들은 변을 조금 더 닮아 있었고, 정의 땅을 선택한 아이들은 정을 조금 더 닮아 있었다. 정의 영역의 아이들은 집을 짓고 마을을 이뤘다. 땅을 나누고 시계 안에 시간을 가두어 나눴다. 반면에 변의 아이들은 시간 개념이 없었다. 그저 그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으며 살 뿐이었다. 신은 그 모습들을 전부 바라보았다.
정과 변은 한날한시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 정과 변은 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겨진 변의 아이들과 정의 아이들은 점점 더 자손을 불려 나갔다. 늘어나고 늘어나서 땅이 모자라게 되자 정의 아이들과 변의 아이들은 신을 찾아왔다. 땅을 늘려달라고 신에게 부탁했으나, 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은 곧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정과 변은 신을 이해해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을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선택들, 자신과 자손들의 선택들을 왜 그냥 두고만 보는지. 참고 참다 정과 변은 신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신은 정과 변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너희들의 선택이니 나는 존중해야만 했다. 중요한 것은 정과 변, 그리고 너희의 아이들 누구도 더 낫거나 더 모자란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변은 그 말을 완벽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들의 선택을 믿어주기로 한 것이다. 반면에 정은 질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은 변의 아이들에게 시간을 가르쳤다. 땅을 늘릴 수 없으니 작은 땅을 더 작게 나눠 갖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 세상은 정의 규칙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변의 기질을 타고난 아이들은 계속해서 태어났고, 그 또한 정의 아이들과 마찬가지의 무게를 가진 이들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의 세상이지만 변의 가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스스로 변의 아이가 되기를 선택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는 변과 정 둘 중 누구도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질서가 된 정과 받아들임을 선택한 변.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살다 보면 우리는 또한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되지 않기를 선택한 변과 되는 것을 선택한 정 사이에서. 받아들임을 선택한 변과 바꾸기를 선택한 정 사이에서. 또한 누군가는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할 것이다. 신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선택은 전부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그 또한 전부 존중받을 만한 것이다.
누군가는 삶을 직선상에 놓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이고, 누군가는 삶을 지금에 두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어쩌면 둘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하는 것은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정의 아이이자 동시에 변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 혼란을 품고 살아가야 함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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