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5. 속하는 것과 속하지 못한 것의 경계에서

   

    2015. 02. 15

    영혼을 갈아 넣는 느낌이다. 아니, 갈아 넣는다기보다는 영혼의 외피를 전부 벗겨서 말랑하고 여리고 투명한 영혼의 속살을 안이 뾰족한 상자 속에 구겨 넣는 느낌이다. 내 영혼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계속 거슬리게 아픈 생채기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생채기가 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나를 그 작고 차가운 상자 속에 밀어 넣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기는, 대가 때문이지. 내 영혼을 밀어 넣는 대가. 그것은 안정감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어딘가를 나다닐 수 있게끔 하는 동아줄. 돈이다.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돈.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안정감을 주는 동아줄이 고작 115만원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대가가 고작 115만원이라니.

     물질에 매몰된 삶, 안정에 저당 잡힌 삶. 물질에 매몰된 삶이라는 게, 그 ‘물질’이라는 게 이렇게 작고 초라한 건지 매몰되고 나서야 알았다. 월급 115만원과 대여섯 시간의 저녁 시간. 그게 나를 꽁꽁 묶어둔 물질과 안정이란 놈들이다. 풍족하진 않아도 먹고 살고 싶어서 선택한 최소한의 물질이 나를 이렇게나 매어두다니. 그런 것들에 내가 매이다니.

    나를 매어둔 동아줄, 밧줄을 목격할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 ‘밧줄을 끊고 싶다’와 ‘밧줄이 닿는 영역에 꽃과 책을 놓아두고 싶다’라는 생각. 밧줄을 끊는다면 나는 편안하지만 비루해질 것이다. 밧줄이 닿는 영역을 꾸민다면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겠지만 여전히 괴로울 것이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옳은 선택은 후자겠지만, 문제는 남아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 힘을 내가 외면하는 걸지도 모른다. 더 힘들기 싫은 거야. 그냥 쉬고 싶은 거지. 나를 몰아붙여야 할까, 놓아줘야 할까. 시도 때도 없이 그런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만 하다 또다시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거운)은 내게 돌아온다.

    답을 내리지 못한 나에게, 타인은 존경의 대상이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거지? 사실 그들도 답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이겨내며? 적응하며? 아니면 그냥 치워두며? 나는 이겨내는 것도, 적응하는 것도, 치워두기도 싫다. 기왕이면 용감하게 살고 싶다. 답을 내리지 못해도 그냥 용감하게 하나의 실오라기를 잡고 매달리고 뛰어들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나를 계속 붙잡는 것은 내 머릿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생각들이다. 신경증적이고 불안에 가득 찬, 쓰레기 같은 생각들.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할래?’

    ‘후회하면 어떡할래?’

    ‘여기까지가 끝이면?’

    그렇다. 나는 뭔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후회가 없으며, 이게 끝이 아닌, 뭔가 대단한 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 내 욕심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이다. 인생이 대단치 않는 게 아니길 바라는 나의 욕망,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자만.

    내가 꿈꾸는 완벽한 세상은 실존하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하다고 말할 거까진 없어도 소중한 어떤 것들을 하며 사는, 그런 삶을 꿈꾼다. 내가 꿈꾸는 세상과 이 세계 사이에서의 균형을 잡고 싶은 마음. 그 마음조차도 사실은 욕심인 걸까. 욕심인 것 같다.

    어쩌면 이대로 매몰된 채 이리저리 휩쓸리며 사는 게 인생의 전부일지도, 본질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내가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컨트롤을 믿으며 왜, 그냥 맡기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냥 맡기면 되는 일인지도 모르는데. ‘받아들임’을 인생 제1의 목표로 삼은 지는 반년쯤 된 것 같다. 그러나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반만년의 인생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그래서 참 흔하고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사는 게 참 힘이 든다.


    2015. 02. 28

    아침에 눈을 떴는데 눈물부터 주르륵 나왔다. 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 바닥이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찐득거리는 바닥의 넝쿨은 나의 온몸을 휘감고 놓아주질 않는다. 겨우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고 화장대 앞에 앉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아마도 어제의 일이 오늘의 내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어제는 사실 몸이 무척이나 아팠다. 이 일을 하는 3년여의 시간 동안 몸이 안 아팠던 적이 드물었다. 특히나 요즘처럼 새 학기 시즌이 다가오거나 혹은 연말, 추석이거나 하면 더더욱이나 그랬다. 출근을 하면 새 학기임에도 물건을 받지 못한 고객들의 원성을 들어야만 했다. 그 원성들이 나를 짓이기는 절구처럼 내 몸을 마구 빻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내 몸은 아이가 놀다 버린 찰흙처럼 짓이겨지곤 한다.

어제는 월요일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출근 준비를 마쳤지만, 도저히 그냥 출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월요일은 제일 바쁜 요일이었기에.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저 병원 좀 들렀다가 출근할게요.”

    팀장님은 이미 출근을 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바빠서인지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래. 최대한 빨리 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독감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다. 아니, 다행인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독감에 걸리면 출근을 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같이 유치한 생각이 든다. 유치하다기보다는 치졸한 생각에 가까운 것 같다. 써놓고 보니 너무 부끄럽다. 그렇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제따라 업무가 너무 힘들었다. 클레임이 많았고 어떤 고객은 45분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퇴근 시간이 다가왔으나 나는 퇴근을 할 수 없었다. 밀린 업무. 후처리. 후처리는 정말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눈물이 나는 순간은 많았지만 어제의 눈물은 유난히 짰다. 3일, 3개월, 3년마다 찾아오는 위기가 이런 것일까. 팀장님은 후처리에 여념이 없는 내게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고 갔다. 고생한다는 듯이.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텅 빈 집은 차갑게 내게로 다가왔다. 몸에 남아 있는 열이 차가운 방의 기운에 몸서리치듯 내 몸을 찌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으, 부르르 떨린다. 다시 생각해도 참 힘든 하루였다. 어제 잠을 자면서는 3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픈 탓만은 아닐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 있던 시간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나를 덮친 것일 테다. 그 시간은 오늘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화장대 앞에서 소리 없이 울던 나는 이윽고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팀장님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팀장님, 저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저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저 그런데 더 이상은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전화가 여러 통 왔다. 받지 않았다. 3년여의 시간, 정규직으로 지낸 그 시간은 이렇게 오늘로 끝이 났다.

    -

 

    지난 일기는 여기서 끝이다. 첫 일기와 마지막 일기 사이에는 수많은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정규직이 되지 않기로. 꼭 돈을 벌어야 한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들어가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자리.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잠시 머무르는 것일 뿐.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의 앞날이 걱정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게 정규직에 대한 미련이나 갈망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자 새 책상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까만 책상만큼 까마득한 부담감이 내게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최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예상할 수 있는, 혹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전부 해내야 된다. 그럼에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잘해야 두 달 치 월급 정도 되는 퇴직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을 구하는 것은 점점 힘들어졌다. 경력은 쌓였지만 그만큼 나이도 점점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을 구할 때마다 점점 더 치열해졌고 절실해졌다. 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일을 구하고 새 직장에 적응하는 일은 때마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온전히 내 것임에서 오는 안정감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공허했다. 공허하고, 또 공허했다. 돈은 모이지 않았다. 내 삶에는 언제나 시작만 있을 뿐 긴 여정의 끝은 없었다.

    이러다 언젠가 갑자기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긴 여정이 없이, 짧은 시작만 있는 삶은 허무감을 가져다줬다. 아, 나는 잘못 태어난 것 같아.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생물로 태어나지 말걸. 차라리 풀이나 나무나 돌 같은 걸로 태어날 걸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출근을 한다. 생은 어쨌거나 이어지는 것이다. 끝이 보이고 또다시 시작이 보인다. 짧게 끊어진 나의 인생. 분절된 나의 삶. 그 삶들을 이어 붙이는 것은 여행이었다. 나는 퇴직금을 받을 때마다 여행을 갔다. 나의 삶은 이곳에 없었다. 여행지에 내 삶을 맡겨두고 오는 것이었다.

    여행을 떠난 그때에만 나는 살아있다. 방랑자의 삶이 나의 운명인 것이다. 속할 수 없는 인생, 그렇다고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도 없는 나의 삶. 어쩌면 이 삶이야말로 2015년의 내가 바라던 삶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공허할지는 몰라도, 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길은 이 길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야 내 삶을 나는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끊어진 밧줄처럼 분절된 나의 삶. 그러나 끊어진 밧줄을 연결하는 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나의 숨.

    나의 숨을 잊지 않고 놓지 않기로 했다. 나의 것은 분명했다. 속할 수도, 속하지 않을 수도 없는 반쪽짜리 짧은 생이지만, 이 생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나의 숨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놓지 말아야지 하고 오늘도 이렇게 일기장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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