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3.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의 경계에서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파란색과 보라색, 빨간색이 뒤섞인 표지가 너무 예뻐서 골랐는데, 읽다 보니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다음은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의 경계에서’라는 책의 일부다. 이 책의 저자는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 이 책을 써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나의 삶도 바뀔 수 있을까.

-

    조금씩 그녀들을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한다. 흉내 내는 삶. 내가 흉내 내는 것은 그녀들의 삶이었다.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지려 하고 연애를 하려고 하고……. 언젠간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젠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나는 그들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가. 왜 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흉내 내며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불안일 것이다. 다름에서 오는 불안. 속하고 싶은 욕망. 어쩌면 내 목숨줄이 걸려있는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도태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

    그래서? 그 끝은? 나는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 사이에서 죽어갈 것인가?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일까? 아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지우고 나면 내 안에는 텅 비어있는 공간만이 남아 버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잃어버린 나의 욕망. 가지지 못한 나의 목소리. 말해질 수 없는 것들. 내 안에 쑤셔 넣어지는 욕망. 내 것이 아닌 것들. 말해야만 하는 것들. 그 사이에서 나는 안개처럼 흐려진다. 흐려지고 흐려지다 공기 사이로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흩어진 잔해들은 회색을 띠고 있다. 그 잔해들을 전부 주워 모으다 손을 베어버렸다. 베어진 상처에는 회색의 물이 든다. 나는 그 앞에서 눈앞이 흐려져 버리고 말았다. 나 자신이 안쓰러워서, 연민이 들어서.

    자기 연민. 그 지독한 늪. 나는 지금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나를 연민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연민이 위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나를 연민하면서 동시에 나를 혐오하는 일에 이제 지쳤다.

    왜 나는 나를 연민하면서 동시에 혐오하는가. 내가 연민을 느끼는 그 지점이 결국 내가 지우고 싶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안개처럼 흐려져 버리는 나. 선명한 선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나. 내가 지우고 싶은 부분이자 나를 연민하는 부분이다.

    오늘은 참 깊게도 나를 연민했다. 그만한 깊이만큼 또 나를 혐오했다. 어제 나는 나를 안개라 부르는 이를 만났다. 중성적인 이미지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곳과 저곳의 중간에 서 있는 나. 그러나 나는 안개처럼 흐려져 있을 뿐 안개는 아니었다. 안개라는 그 속에도 나는 속하지 못한 것이다. 나를 안개라 부르는 순간 나는 안개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내가 속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숲도, 콘크리트 도시도, 숲과 콘크리트를 아우르는 안개 속도 아니라면 이 별에 내가 속할 곳이 있긴 한 걸까. 나는 어쩌면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이 별에 추락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떨어진 한낱 별 조각인 것일까.

    나의 정체를 찾고 싶다. 내 목소리를 찾고 싶다. 나를 찾고 싶다. 나를 잃어버린 건지, 내가 원래 이런 존재인 건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나’로서 살고 싶다. 소속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라는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고 싶다.

    자기 연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가지지 못한 나의 목소리, 말해질 수 없는 것들과 내 것이 아닌, 말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과연 나는 정리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해야겠다. 해야만 하겠다.

    처음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 어릴 때부터 기억을 되짚어 보아야겠지. 어릴 때의 나는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목소리 큰 아이였다. 그래, 나는 여자답지 못한 아이였다. 여자답다는 말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자 같은 아이였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목소리가 큰 나는 남자아이들과 더 자주 어울리긴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완벽히 어울리진 못했다. 어쩌면 여기에 모든 일의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새삼 선명하게 다가오는 말들. 여자답다, 혹은 남자답다는 말들.

    어쩌면 내 인생은 ~다워지기 위한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다워지기 위해 남들을 흉내 내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학생답기 위해, 성인답기 위해, 여자답기 위해, 사회인답기 위해 내 인생을 전부 바쳤다. 그러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그중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들은 전부 그런 것들이었다. 학생의 목소리, 성인의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 사회인의 목소리…….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의 대본 같은 말들이다. 대본을 달달 외우기에 급급한 삶이었다. 그러나 나는 암기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그마저도 제대로 해오지 못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내가 내고 싶은 목소리. 외우는 것이 아닌 우러나오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 나는 그 목소리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결국 그것들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되었다. 대신에 꼭 말해야만 하는 것들을 내뱉었다. 외운 대본을 겨우 되짚으며.

    대본을 외우는 삶에 신물이 난다. 기계처럼 달달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서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다. 활자의 모서리들이 나를 날카롭게 찌른다. 결국 나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나고, 그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다시 상처가 난다.

    아, 나를 연민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상처투성이의 나. 나를 찌르는 대본의 활자들을 날려버리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목소리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차갑게 굳어있는 활자가 아닌 말랑하게 생동하는 말들을 내뱉으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대본을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외우기 시작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사춘기 무렵이었다. 성당을 다니던 나는 당시에 성가대 일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가대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꽤나 수려한 외모에 다정한 성격의 그. 그는 노래를 무척이나 잘 불렀다. 듣기로는 공부도 무척 잘한다고 들었다. 나는 곧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매주 주말이 기다려졌다. 평일에는 그를 상상하며 괜스레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의 앞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못했지만.

    그런 그에게 곧, 애인이 생겼다. 아, 나와는 무척이나 다른 사람이었다. 긴 머리에 가녀린 그녀는 그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나는 상심이 컸다. 뭐가 문제인지는 분명했다. 그제야 거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그랬다. 결국은 사랑이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에 대한 욕망은 결국 모두에게로 번져갔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연기가 서툰 나는 나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행동과 말들을 하나씩 지워내는 수밖에는.

    입을 점점 다물었다. 행동을 조심했고, 나를 숨겼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미움받기 싫은 욕망으로 변모했다.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남들과 비슷한 부분만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그렇게 말들을 집어삼키고 집어삼키다 결국 안개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미움받지 않고 사랑받으며 살아왔을까.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미워했고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더 이상 잘못했다고 채근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눈물이 난다. 그동안 나 참 많이 애썼구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내 살을 깎아냈던 시간이 참 안쓰럽다. 자기 연민. 그러나 혐오가 아닌 위로. 나는 이제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애썼다고, 그동안 힘들었겠다고 토닥일 수 있다.

    나는 대본을 찢어버린다. 찢어지는 소리가 쾌활하다. 찌익 찌익, 경쾌한 소리에 맞춰서 나는 춤을 춘다. 찢어진 대본들을 헤집고 찾아낸 하얀 백지를 마주한다. 백지를 바닥에 깔고 그 앞에서 엎드린다. 나는 아이가 된다.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어댄다.

    내 앞에는 크레파스가 놓여있다. 자,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 나는 골똘히 생각한다. 일단 선을 하나 그어보기로 했다. 보라색의 선이다. 색이 제법 내 마음에 든다. 아직까지 뭘 그려야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선을 그어낸 내가 자랑스럽다.

    그래, 나는 흑백의 세상에서 색깔을 발견했다. 이제 나는 이 크레파스들로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말하지 못한 것들을 집어삼키고 말해야만 하는 것들을 말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살 것이다. 말해야만 하는 것을 집어삼키며, 말하지 못한 것을 내뱉으며, 그렇게.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