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곱 번째 이야기 / 11월 셋째 주

   마을 자투리땅의 풀을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연배를 가늠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정원도 제법 가꾸고, 누구나 논둑이나 밭둑에도 콩을 심었으며, 길가에 많은 꽃도 심어져 있었고, 마을 귀퉁이마다 은행나무나 앵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류나무부터 해서 이름 모를 꽃들로 정원을 가득 채우셨던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떠나셨고, 늘 기운차 보였던 옆집 할머니도 허물어지는 정원의 울타리에 그저 작대기를 세워둘 뿐 재정비하기 어려우실 정도로 늙으셨다. 함께 뛰놀던 또래들도 다들 이 마을을 떠났다. 우리 집만 해도 세 딸 모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마을을 나서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이룩한 분들만 남아 가까스로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동네는 날이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는 시골의 전형을 따르다 보니, 이제 논둑에도 밭둑에도 콩보다는 풀이 더 흔하다. 농작물 없이 묵혀 둔 땅이 지천에 있어서 자투리땅을 아까워할 겨를도 없다. 땅의 주인들은 오는 세월을 막지 못하여 해마다 아픈 곳이 늘어나고 한 해 두 해를 거듭할 때마다 그 기운이 달라진다. 연로한 어르신들이 땅을 경작하는 것이 어려워서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농사지어 먹으라 하시지만, 젊은이의 기준이 50대부터고 그들의 기운과 관계없이 그 수도 절대적으로 적으니 노는 땅이 허다한 것이다.


    땅을 일구지 못할 정도로 연로하신 동네 어르신들을 뵈면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난다. 그것을 시샘이라 해야 할지, 화라고 해야 할지, 원망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저들은 저렇게 팔팔하게 살아가는데 왜 우리 아빠는 그토록 허망하게 떠났을까 하는 인간 운명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정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엄마랑 동생이랑 저녁으로 자장면 시켜 드시고, 출근하시는 엄마에게 잘 다녀오라고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셨단다. 그 인사가 부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아빠는 그날 새벽, 마당에서 산책을 하시다가 쓰러지셨고 구급차에서 의식을 잃으신 후 그대로 떠나고 마셨다. 


    밤새워 일하다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병원으로 오신 엄마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른다지만 그 이야기가 막상 눈앞에 벌어지니 그 황망함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으랴.


    그 와중에 엄마의 가방은 묵직했다. 전날 아빠가 추어탕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엄마는 레토르트 식품으로 나온 추어탕을 사서 가방에 넣어뒀던 것이다. 추어탕이 든 가방을 들었을 때 아빠가 이제 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셨다는 게 실감 났다. 왜 그 흔한 국밥 한 그릇, 잘 만든 추어탕 한 그릇 사드릴 여유 없이 살았을까 하는 후회로 고통스러웠다.


    수능시험을 마치고서부터 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고, 대학에서도 공부하고, 사람들 만나고, 봉사활동하고, 동아리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여전히 바빴다. 이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니들도, 엄마도, 아빠도 각자의 사정으로 늘 바빴다.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심리적인,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정말 별안간에 아빠가 떠나셨다. 몰려오는 황망함과 후회에 괴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 절망을 회피하지 않고 올바르게 마주하고 싶었다. 고통을 객관화하고 삶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가늠해 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바쁘게 살았던 지난날을 자책하고 원망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던 객관적인 이유들을 인식함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보듬을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하고 나니 바쁘다 못해 무책임해 보였던 언니들과 엄마도 그 삶이 새롭게 이해되었다. 


    공교육과 미디어와 기독교는 나를 ‘꿈꾸는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으니 원대한 꿈을 품으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느 누군가에겐 유효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었다. 내가 처한 삶의 위치를 명확히 가늠하고, 탐구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다. 소위 말하는 성공 신화를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내가 처한 삶의 위치에서 내게 주어진 이들과 하루하루 친절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빠를 떠나보내며 알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외할머니의 팔순으로, 외가 식구들이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아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쁜 자리였다. 그 자리를 위해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처음으로 미용실에 가셨다. 또 큰일 치르고 밝은 옷 입으면 사람들이 뭐라 한다며 여름에도 내내 무채색 옷만 입으셨는데 새 옷도 한 벌 장만하셨다. 밝게 웃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렇게 엄마도 우리도 조금씩 새롭게 일상을 만들어가고 적응해가고 있구나, 싶다. 아빠는 떠났지만 우리는 남았다. 남은 우리의 추억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상에서 아빠도 새롭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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