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덟 번째 이야기 / 11월 네째 주


   어릴 적만 해도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두 다 문을 닫고 한곳만 남았다. 그마저 남은 한 곳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10분 거리에 있는 시내의 큰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 거래를 애용하지 그 구멍가게에서는 과자 한 봉지도 구매하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가용이나 마을버스 등의 교통은 편리해지고 자연스레 구멍가게의 소비자가 감소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떠나니 구멍가게의 진열대도 해를 거듭할수록 초라해져 마침내 담배가 주력상품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어디 구멍가게뿐이겠는가.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탯마당’ 혹은 ‘떼지거리’라 불렸다. 전자는 타작을 많이 하는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후자는 집들이 떼로 모여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에서 보이듯 우리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이제 동네의 젊은이가 도시로 떠나거나 나이를 먹어 중년 이상이 되었고, 나의 유년시절을 함께했던 마실 다니시던 할머니들도 우리 할머니를 포함해 대부분 돌아가셨다. 하지만 우리 동네가 헛헛해진 것은 비단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진행된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집들이 떼로 모여 지내던 작은 우리 동네. 이 동네를 대표하는 가장 큰 길은 겨우 1톤 트럭 지나갈 정도의 작은 비포장도로였다. 어린 시절 옆 동네 사는 친구들이 우리 동네에 놀러 오면 이 길이 참 부끄러웠다. 길이 좁은 건 둘째치고, 여기저기 움푹 패었던 까닭이다. 간혹 차를 태워주시는 분들은 늘 ‘길이 너무 안 좋다’며 한 소리씩 하시곤 했는데,  그때는 길을 향한 그 말이 우리 동네를 향한 말처럼, 우리 집을 향한 말처럼, 이윽고 나를 향한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5-6년 전, 그 좁고 괴팍했던 비포장도로가 잘 닦인 2차선 도로에 인도까지 갖춘 모습으로 변모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가히 그 일이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넓고 반듯하게 닦인 길을 따라 크고 작은 공장들이 여럿 들어섰기 때문이다. 공장이 주변 경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수십 대의 공장 차량이 집 앞의 큰길을 오가 우리 집은 소음과 진동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집에 내려와 살며 이 불편함, 나아가 고통이기도 한 상황을 실감 나게 마주하니 이내 화가 치밀었다. 책을 읽기도 힘들 지경이고, 야간에 일을 하셔서 낮에 주무셔야 하는 엄마가 안쓰럽기도 했다.


    해당 공장들에 전화해서 불편함을 호소하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차량의 통행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답답할 뿐이다. 또 전화를 받는 이들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도 아니고 어디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고, 지자체도 세금이 걷히니 공장에 허가를 내주고, 결국 큰 틀을 만든 이들은 뒤에 있고 회사 직원과 주민들만 전화를 붙잡고 신음할 뿐이다.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구조를 파악하다 보니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과 경찰들이 마주 보고 대치하던 상황들도 떠오르고 결국은 이 속세를 떠나 산골짜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사회가 주는 불편함에 속이 메스껍다가, 사회 덕에 향유하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인정하며 스스로를 달래어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을 그런대로 받아들이고 또 오늘을 살아간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책상 구매’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기 때문에 거실의 식탁과 동생의 책상으로 내 방에 책상을 구매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다섯 개월째 이 방에서 생활한 결과, '나의 책상’은 필수품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나만의 방과 나만의 책상,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는 경험이다. 이 설레는 경험을 만끽하며 책상 구매와 함께 방의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가며, 또한 변화시켜야 하는 것들에 집중해가며 다가오는 겨울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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