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리가 계속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며
- 삼 년째 이야기: 정수, 은수(연재 종료)
- 2021. 7. 29. 11:34
다정한 은수 님께
모든 게 흘러내릴 것 같은 더운 날이 계속되고 있네요. 잠깐 외출해도 마스크 안이 땀으로 범벅되는 게 너무 싫어요.
요즘 마음은 너무 혼란스러운데 무료한 날을 보내고 있어요. 일도 손에 안 잡혀서 해야 할 일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해요. 너무 심심한데 아무도 만나기가 싫고요. 조금쯤 충동적인 상태이면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답답한지 잘 모르겠어요.
한 달 정도 자기 전에 게임을 하고 잤는데요. 게임에서 친구가 한 명 생겼어요.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음성으로 대화하며 게임을 하게 됐고 사적인 대화도 나누며 친해진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이성이기도 하고 늦게까지 같이 노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배우자가 싫어했어요. 그래도 제가 워낙 재밌어하니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참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전 재밌어서 계속 즐겼어요. 제가 그 친구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낀 건 아닌데요. 상대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는 게 아주 재밌더라고요. 전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고 친구로 지내고 싶은 마음에 상대의 선 넘는 행동에 모호하게 반응했고, 늘 제 단점 중 하나로 꼽히는, 맺고 끊음을 못해서 게임 목적이 아닌 사적인 연락까지 온 것을 배우자에게 바로 들킨 거예요. 저는 바람피울 재능은 없나 봐요.
배우자에게 미안해서 솔직히 이야기하고 사과하면서도 사실 전 너무 재밌었는데 이제 재밌지 않을 테니 그게 속상한 마음이 더 크더라고요. 제가 너무 제멋대로라는 생각과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어요.
근데 이번 일을 계기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광장공포증을 핑계로 배우자에게 너무 의존적인 삶을 살고 있었구나 하는. 이번에 바람(?)피운 일도 배우자가 바빠서 저랑 원하는 걸 같이 못해주고 혼자 외롭고 심심하던 타이밍에 생긴 일이거든요. 제가 혼자서 가고 싶은 곳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잘 할 수 있다면 지루할 틈도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할수록 한심하게 느껴지고 답답해요.
그래서 일단 산책부터 혼자 해보고 있어요. 타이밍이 코로나도 심하고 날도 더운데 그래도 지금 아니면 또 이대로 만족해버릴 거 같아서요. 게다가 오히려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좀 더 용기가 생겨요. 오늘은 오랜만에 조조 영화를 혼자 보고 왔어요. 배우자를 만난 후로는 혼자 영화 보는 일이 거의 없어졌거든요.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조만간 혼자 좀 멀리 호캉스도 가고, 괜찮으면 혼자 여행도 가보려고요. 조금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러네요.
요즘은 정말 저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자의식 과잉에 파묻힌 거 같아요.
근데 이런 나밖에 생각 못하는 저한테 전화도 해주고 같이 수다도 떨어주는 은수 님이 있어서 놀랍고, 외롭다고 어리광부릴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것도 참 다행이죠. 이 상황을 이해해주는 배우자도 너무 고맙고요. 새삼 이런 상황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전까지 하수구가 꽉 막힌 거처럼 답답했는데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어요.
하소연만 가득한 편지가 되어버린 거 같은데 어쩌죠. PMS 기간에는 역시 편지를 쓰면 안 될 거 같아요.
은수 님은 요즘 뭐가 제일 하고 싶나요?
전 당분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돈 드는 거 빼곤 다하려고요(원래 그랬던 거 같지만).
은수 님이 보고 싶은 밤이네요. 잘 자요.
쾌락주의 시즌 정수 씀
늘 노력하는 정수 님께,
오늘도 최고온도 37도, 뜨거운 아침 햇빛을 정통으로(?) 맞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났어요. 이렇게 뜨거운 여름 햇빛에 말 그대로 몸이 지글지글 타는 것 같은 더위를 느낄 때면, 어릴 적에 국민생활관으로 수영 다녔던 게 생각나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만, 제가 수영을 다녔던 그해 여름이 기록적인 더위의 기준이 된 해 중 하나더라고요. 재밌는 건 수영을 한 기억은 잘 없는데, 다닌 기억만 난다는 거예요. 셔틀버스 내려서 걸어오는 길에 가끔 문방구에서 사먹은 200원짜리 슬러시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나요. 한 입 먹었을 때의 그 시원한 안도감! 그때의 고민이라곤 오늘 슬러시(계절에 따라서는 컵떡, 피카츄 돈까스)를 사먹을까 말까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제 많은 고민을 껴안은 어른이 된 게 아주 가끔은 아쉬워요.
저도 요즘 정수 님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 막막함을 느끼고 있어요. 지금 제 상태가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요, 정수 님도 아시다시피 지난해 말부터 제가 이직을 준비했잖아요. 그 뒤로 여러 차례 서류나 면접에서 떨어지면서, 지금은 이직을 위한 노력을 그만둔 상태에요. 도전하는 일이 두렵다거나 떨어진 게 슬프다거나 하진 않는데, 다만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에요. 거기다가 최근에야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난 뒤의 상실감이 조금씩 밀려오고 있어요. 지금 직장에서의 기간과 같은 기간 함께 했다 보니, 직장을 옮기겠다는 결심과 함께 뒤이은 연인과의 이별이 아무래도 따로 생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직장도 연인과의 관계도 오랜 시간 노력해왔지만, 지금의 제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드는 큰 요인이긴 했거든요. 이 정체감을 해소하기 위해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가 싫어져서 헤어졌다기보다, 더 이상 서로에게 노력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걸 깨달아 헤어진 것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엔 제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저와 맞닿아있는 인연들에 대해서는 제법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익숙해진다는 건 그간에 쌓아온 시간의 가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해결할 수 없었던 어떤 문제들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함께 노력할 것인지를 계속해서 선택해야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도 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관계라는 건 혼자 선택하는 힘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요즘 혼자 있을 때면 종종 무언갈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해요.
이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울게 되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회사를 나가고 일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상을 유지해나가요.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제 일상을 휘청이게 하진 않지만, 한편으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무뎌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제 일상(환경)이 위태롭지 않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겠죠. 나아가 제가 그만큼 혼자서도 서있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할 테고요. 어느 쪽으로 생각해야 좋을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좋은 시간들만 생각난다는 거예요. 내가 더 잘했거나, 그 사람이 더 잘못했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잘 지냈다고, 그렇게 생각되어요.
저의 이런 속이야기들에 정수 님은 마음 아파할 테지만, 제가 일상을 유지하고 견디는 데에 정수 님의 응원과 조언들이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갖기를, 제 삶의 선택을 늘 지지해주었던 정수 님의 모습들이 제 안에 쌓이고 쌓여 일상이 휘청이지 않고 서있을 수 있게 해주고 있어요.
정수 님은 요즘 재미있는 일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또 다른 무언가를 도전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자기 안의 에너지를 발산할 기회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척 존경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정수 님의 일탈도, 홀로서기도 곁에서 함께하며 정수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건 스스로의 선택과 감정,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는 데에 힘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정수 님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정수 님이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칠 만한 일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믿으니까요.
늘 우리의 선택이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 혹은 손에 쥘 수 있는 유의미한 성과로 되돌아오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요가를 시작한 은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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