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 꿈을 꿨어
- 삼 년째 이야기: 정수, 은수(연재 종료)
- 2021. 11. 4. 19:26
정수 님께,
정수 님, 요즘 하늘 보고 계신가요? 밤에만 산책을 다니셔서 가을의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못하셨을까 괜한 염려를 하고 있어요. 저는 며칠 전 2차 백신까지 모두 접종을 완료했어요. 왜인지 백신을 맞고 나니 더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서 하루에도 한강을 몇 번이나 걸었는지 몰라요. 어제는 자전거를 좀 탔는데, 나무그늘 아래를 지나가면 제법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서 귀가 시렸어요. 하지만 가을은 밤이든 낮이든 아름다운 계절이니 정수님의 요즘 밤 산책에는 또 다른 묘미가 있겠죠?
며칠 전에 오랜만에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속 세상이란 게 늘 이상한 일투성이지만, 그날의 꿈은 좀 특별했어요.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지만, 제 시선이 닿는 저 끝에서 끝까지 아주 거대한 수조가 저를 둘러싸고 있었어요. 뒤는 어둠이었지만, 제 앞과 옆엔 모두 수조가 있었고 바다처럼 거대하고 투명한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죠. 수조 속임에도 불구하고 물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어요. 실은 제가 상자에 갇혀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컸어요. 저는 이렇게 거대한 물이 나오는 꿈을 꾸면 기분이 좋아요. 시야의 끝엔 비록 어둠이 있을지라도 두렵다기보다 거대한 물의 움직임 속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껴요. 무한한 물 속 세계에서 해방감과 동시에 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해요. 꿈속에서 물은 감정의 영역을 의미한다는데, 정말 오랜만에 꿈에 물이 나와서 기뻤어요.
정수 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퇴사를 꿈꾸기 시작했어요. 지금 하는 일이 특별히 싫은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여기서 배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에요. 함께 있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이곳에 안주하게 된 스스로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요. 내년이면 이제 9년차임에도 급여는 형편없지만, 욕심이 없는 터라 급여에 대한 불만은 그리 크지 않아요. 넉넉하진 않아도 굶고 지내진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요. 이전에 퇴사나 이직을 고민할 때에는 여기서 수입이 밑으로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는데(전 제 자신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높게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거든요), 어느 순간... 정말 어느 순간을 지나며 퇴사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고, 얼마간은 쉬고 싶고 쉴 수도 있다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서 계획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퇴사가 정말 두려움 하나 없이 제 손안에 온전한 하나의 선택지가 되자, 견디기 어려웠던 회사 생활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람이란 참 신기해요.
야심차게 우리의 대화를 선보이겠다 했던 지난 1화의 포부와 다른 길을 통해 마지막 회로 흘러왔네요. 그간 힘들어하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에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이 글이 끝나고 난 뒤에도 우리는 한참을 헤매고 바닥을 나뒹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톡톡 털고 일어나 힘차게 걷는 날들이 이어지겠죠. 하지만 우리 곁에서 곁으로 확장될 관계들 속에서 넘어진 채로 주저앉는 사람이 없도록 이 연결을 더 단단히 하고 싶어요.
약하지만, 강한 친구들을 둔 은수 드림
은수 님께
요즘 날씨가 너무 좋지요? 하늘이 맑고 약간 강한 듯한 바람이 고민을 다 날려줄 것처럼 상쾌해요. 지금처럼 좋은 날씨는 금방 지나갈 것 같아 최대한 즐기려다 보니 약간 초조한 마음도 들어요.
그래서 매일 산책 가는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어요. 산책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건 단연 은수 님 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얼마 전 의식의 흐름대로 아침에 갔던 여의도 샛강 공원도 정말 좋았어요. 저 혼자였다면 움직였을 리 없으니 은수님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게 새삼 큰 행운으로 와 닿네요.
최근 퇴사를 준비하시느라 생각이 많겠고 여러모로 복작복작하실 테지만 제가 보기에는 은수님의 어깨가 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전적으로 제 생각이지만요. 은수님은 뭐든 제가 예상한 것보다 더 잘하세요. 아주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행동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뭐든 신뢰가 가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죠. 물론 귀여운 허당끼도 있지만요.
최근 제게도 이런저런,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들이 있어서 혼란스러웠고, 사실 여전히 혼란스럽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 넘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 사건들이 제게 일깨워준 것은 어쨌든 홀로서기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배우자에게 필요 이상 기대어 온 날들이 너무 길어져서 배우자와 저 모두 조금 힘든 상황이 생긴 것 같아요.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기는 해요.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안했던 문제가 반복되는 느낌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결혼이란 걸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냥 룸메이트처럼 지내거나 동거하는 거랑 뭐가 다를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제도에 묶인 순간부터 부부는 하나가 되고 또 그러면서 변하는 것들이 꽤 있었던 거예요. 재산 관리에서 시작해 주변의 시선까지. 그런 부분 때문에 저희 부부는 다툼이 꽤 있었고, 서로가 생각하는 결혼관이 다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전화 한 통 제대로 못하던 제가 독립을 하겠다며 혼자 여행을 떠나고, 거짓말도 했어요. 휴대폰 비번을 바꾸겠다는 등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다 보니 배우자도 당황스러웠겠지요. 한동안 크고 작은 싸움들이 잦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아지는 과정이라 생각하자고 합의하기는 했어요. 사실 배우자가 저를 돕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만큼 고집도 세고, 평소에 저를 많이 이해해주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은 정말 완고해요.
사실 이번 일을 겪으며 배우자가 제게 보인 감정과 행동을 보면서 그 역시 저에게 큰 의지를 했구나 싶더라고요. 어떤 면에선 배우자에게도 저에게 잘된 것 같아요. 문제점도 알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배려하고 믿고 있는지도 깨달았거든요. 병원 선생님은 제 문제를 한마디로 말씀하시길 ‘평가 중독’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결혼했을 때 문제가 되기도 한대요.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나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한숨이 나오긴 하더라고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기도 했어요. 단지 평가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뭔가를 찾고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 불안정하고,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매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요.
죄책감과 자책을 느끼는 저에게 늘 좋은 조언을 해주시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시는 은수님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한편으로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걱정도 많이 됩니다.
앞으로도 저는 여러 감정과 깨달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해 갈 것 같아요.
요즘은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매일 카페에 나가고 산책을 다녀요. 저를 위한 시간을 제대로 누리는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혼자 있는 시간이 불안하기만 했거든요.
나름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 연재가 끝난다니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드네요. 많은 걸 배우고 알아간 시간들이었어요. 3년째는 이제 끝나지만 앞으로도 4년, 5년 쭈욱 함께해요.
9월- 사고뭉치 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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