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니들 왜 그러고 사니 by 이나

    평화는 누군가 참는 사람이 있는 표면적인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물학적 여성성별이기에 워낙 타고나길 화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자유롭게 분출시킬 수 있는 신분(네.. 저는 미천한 신분...)은 아닌지라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을 때는 주로 키보드 워리어로 활동하는 게 고작인 정도. 성차별주의자들의 활자로 된 배설물들을 견딜 수 없을 때면 심호흡을 하며 비추나 신고를 먹이면서 멘탈을 관리하는 게 고작인데, 얼마 전에 그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누군가와 싸우는 것 자체가 체질적으로 힘들어서 좋게 넘어가려 하는 편인데 그날따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원인은 유튜브 댓글창에 좌표를 찍고 달려온 ‘그’ 성별.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역대 올림픽 중 여성 선수 참여율이 50%에 가장 근접한 데다 특히나 여성 선수들의 선전 덕분에 한껏 임파워링 되어있던 때여서 그랬던 것도 있는 것 같다. 문제의 영상은 공영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이었고 우리의 안산 선수가 생방송으로 출연해 멋쁨을 뽐냈던 클립이었는데 댓글창이 망조로 치닫고 있었다. 올림픽 기간 중에 자국 선수가 경기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어그로를 끌어대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던 것도 모자라 그때의 소행을 중국 동포에게 돌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를 전시하는 그들의 유해함에 분노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 진창에 발을 디디고 말았던 것.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제 계정은 higher further faster, 제가 상대했던 성차별주의자는 비둘기입니다. 논쟁하던 중에는 톱니구름이더니 캡처 뜰 때 보니깐 스리슬쩍 개명을 했더라구요?>

    "안티페미니스트가 성차별주의자라면 그에 맞는 정당한 이유를 대고 말하세요 논리도 없이 무작정 말하지 말고. 그리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페미니즘 활동 대체 왜 합니까?"
    (‘페미니즘 활동’이라니... 활동...??? 저들에게는 페미니즘이 어떤 공작이나 지시 같은 것으로 구성된 사상집단으로 보이는 건가? 지들이 ‘일베 활동’하는 것과 등치시키는 저 수준이라니... 솔직히 이때부터 정신적 데미지가 말도 못할 만큼이었음)

    "페미니즘의 시초가 그 당시 여성들의 인권을 다시 되찾고 진짜 성평등을 이루는 정말 좋은 단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성평등을 외치는 페미니스트들과 남성혐오를 하고 여성우월주의인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로 갈라진 거 같네요. 저도 여성의 인권은 반드시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성의 인권도 그렇고요. 또한 성별뿐만이 아닌 노약자나 어린이,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 리버럴 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을 지지합니다. 어느 한 성이 뒤처지지 않는 세상을 원하거든요. 그래서 여성우월주의인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지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을 옮겨 적는 것 자체가 곤욕임. 정말 어느 한 성이 뒤처지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거 맞을까 중학생아...?)

    "음~!! 레디컬이군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과연 50~60년대에 태어나신 할머니분들보다 차별을 많이 받았을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너의 논리에 의하면 어느 한 성이 뒤처지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마찬가지인데 그럼 너도 레디컬 아닌가요? 레디컬이라는 단어의 뜻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을까?? 그리고 너 흑인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겠어요? 노예제도 있던 옛날보다 지금은 차별이 덜하니까 불평불만 그만하라고? 전보다 나아졌으면 그만이고 더 이상 나아지려는 노력은 흑인우월주의라고?)
 
    처음 달린 대댓글을 본 순간 막막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러다 나도 해코지 당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저 악의의 이유와 구심점은 무엇일까. 자기 것을 빼앗긴다는 위협에서 우러나온 페미니스트에 대한 의도적이며 그릇되고 해로운 편견?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데다 그 해악성으로 인해 국제적 지탄을 받게 되자 갑자기 노선을 변경하는 나름 조직적이며 지능적인 작태? 돈 안 드는 활동에만 화력이 넘치는 찌질스러움? 하지도 않은 항의 전화를 했다며 과시하는 허풍과 그 허풍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역으로 상대에게 그로 인한 피해를 탓하고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함? 에펨코리아(이하 펨코)에서 시작된 K-인셀들의 악다구니를 부둥부둥해준 언론이 이 하찮고 미미한 불씨를 초가삼간까지 태울 만한 거대한 화마로 키워버려 이 난리가 난 건데 한낱 개인인 내가 대체 무슨 수로 이걸 상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왜 굳이 이런 감정소모를 해야 하는가. 종국에는 그저 황망한 심정이었다. 

    기득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당연하게 여기며 번식탈락에 분노한 (성인)방구석 투사이겠거니 하고 호전적으로 나갔는데, 스스로를 중학생이라고 밝혀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사람 하나 만들어보자는 알량한 오지랖과 호승심에 취해(네.. 시작부터 잘못된 거죠) 대화를 시도했다가 냅다 구정물 세례를 당해버렸다. 문단마다 수준차가 심한 것이 본인의 사고를 거친 게 아니라 어디서 복사해 온 글을 옮기는 데 급급한 일개 성차별주의자를 상대하면서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정성껏 마련한 산해진미를 단지 익숙하지 않고 처음 보는 음식이라며 거들떠도 안 보는 의심과 편견이 심한 가까운 지인을 응대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다. 미맹이거나 음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한 번이라도 느끼게 되면 사람은 기꺼이 달라질 것이다. 호기심과 경험, 그로 인해 자신 안의 세계가 확장되고 성숙해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면. 일상을 답습하는 것만이 평화요 진리인 사람은 평생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혀 답답하게 사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마침 이 논쟁이 벌어졌던 때가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4강전이 벌어지던 때였는데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손을 벌벌 떨면서 폰만 쥐고 있는 내가 남편 눈에는 꽤나 이상해 보였나 보다.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자 긴장을 풀고 한숨을 쉬며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런 이상한 애들을 상대했냐고, 그런 애들 수틀리면 신상 털어서 못된 짓 할 수도 있는데 그냥 무시하라고. 또 해맑게 제3자나 할 소리를 했다. 

    ...따지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끝도 없다. 환멸뿐인 세상.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접어두기에는 억울하고. 저 같잖은 설전을 캡처하면서 당시에 느꼈던 분노와 짜증이 되살아나는 통에 참으로 심난했지만 어쩐지 저들의 같잖음을 함께 비웃고 싶고 어디에라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그 모든 씁쓸한 감정을 넘어섰다. 어찌됐건, 내일은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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