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의 도시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9. 10. 14:00
행복한 사람의 도시
자신의 도시에서, 자기 공간의 주인으로서,
즐겁고 금빛인 인생의 아침부터
꼭 같은 장소에 계절이 돌아오는 풍경을 음미하고
차분한 오후가 따라오는 낮 시간을 만나는 행복한 사람
아름다운 비둘기처럼 변함없고 꾸밈없는
달과 해는 그의 저택으로 향하고,
싹을 틔우는 장미나무와 같이,
행복한 사람의 삶은 매시간 빛에서 꽃피운다.
그는 나아가지, 운명의 그루터기에 새싹을 돋게 하고,
들쑥날쑥한 나뭇가지와 먼저 난 나뭇가지를 섞으면서,
그의 정연한 마음은 꼭 그의 정원처럼
오래되어 잎이 없는 나무껍질 위에도 새로운 꽃들이 가득하지.
행복한 사람은 그림자와 사랑,
노을에 타는 듯한 풍요의 언덕들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무수한 날들 속에서,
도시를 흐르는 강가에서 꿈을 향한 목마름을 해소해나갈 수 있는 사람…
원문 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la-cite-natale.php
민주
이 작품의 원제는 La cité natale (라 씨떼 나딸르) 입니다. 직역하면 ‘태어난 도시’, 즉 ‘고향’이 되겠지요. 그런데 ‘태어난 도시’라고 옮기기에는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고 사랑하는 도시를 대하는 태도가 주로 드러난 시의 내용과도 딱 맞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고향’이라고 옮기기에는 [도시, 소도시, 발상지, 중심지] 등으로 일컬어지는 불어 cité (씨떼) 와 확실히 대응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작가 안나 드 노아이유가 당시 가장 현대적이었던 도시 파리에서 여러 예술가와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복잡다단한 도시. 좋은 일도, 희한한 일도 벌어지는 장소들. 화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늙어가면서, 또 도시의 작은 조각들을 새로 만들고 또 원래 있던 가치들을 지켜가면서, 자신을 도시 유산의 한 조각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졌습니다. 인위적으로 갈고 닦은 터에서 자연의 흐름과 그를 가장 빼닮은 인간 내면과 그것을 가꾸려는 마음에 집중한 것도 인상 깊었고요.
이 시에서 ‘행복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에서의 첫 등장은 1연 4행이지만 원문에서는 1연 1행을 여는 단어가 Heureux (으후),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안나 드 노아이유를 두고 상상해서 여성으로 대입했지만 으후는 여성형과 남성형이 똑같은 명사입니다. 마음의 고향에서 시간과 자연과 꿈을 돌보는 데에 여자 남자가 다르진 않겠지요.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맞이하고, 식물의 마지막 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초록이 가득한 정원처럼 정성 들여 마음을 정돈하고, 다른 도시로 물길이 뻗치는 강가에서 휘몰아치는 욕망을 실현할 길을 찾는 사람. 아기자기함과 단단함, 야망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읽어내다 보면 조바심이나 열등감보다는 ‘내가 진짜 편한 장소가 있지. 그래, 거기.’ 혹은 ‘나를 돌보느라 잡생각 할 시간 없는 장소에 몸을 맡기자’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분명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스템은 인위적이지만 결국에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중요하고 내 마음이 다입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여러분께 보여드린 제목은 앞서 감상하신 대로 ‘행복한 사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독자분이 서 있는 곳이 어떤 장소인지 제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곳의 변화를 마음으로 소화하고 꿈꾸는 여러분이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소개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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