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몸 이야기1
- 뿌리는 밤: 하타라
- 2021. 12. 13. 15:01
일을 하다가 자꾸 손바닥을 본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일이 안 풀려 얼굴을 감싸다 문득. 화장실을 가는 길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가만히 손바닥의 주름을 쳐다본다. 지문을 하나씩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지문은 엄마뱃속에 있었을 때 양수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던데 그렇다면 이 무늬는 내가 기억하기 전의 기록이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손바닥 주름이 조금씩 깊고 진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고, 내가 그만큼 더 살아왔다는 것을 손바닥의 흔적을 통해 느낀다.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손바닥만이 아니다. 요즘 내 몸을 온전히 내 시선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타인과 세상의 기준에 맞는 몸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무의식적으로 세뇌당한 채 성인이 되었다. 코가 높고 눈이 크고 이마가 볼록 나와 있고 말라야 하고, 피부를 더 희고 매끄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화장을 해야 하고, 자기 관리라는 명목 하에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다. 그 밖에도 무수히 많은 제한 속에서 살아왔다. 처음엔 언제 쌍꺼풀이 생길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역시나 수술을 해야 할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한약을 먹든 헬스를 끊든 살을 빼야 하나 생각도 했었다. 사람을 만날 땐 꼭 화장을 했고 내가 입고 싶은 옷보다는 남들이 입는 방식을 따라서 옷을 골라 입었다.
그렇게 늘 나는 타인이라는 필터를 통해 나를 보고 세상을 봤다. 거의 20년은 내가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 처음으로 온전히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 첫 체험은 21살 일본 유학을 했을 때 했다. 외지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정말 딱 혼자가 되었다. 이전의 날 아는 사람, 지금의 날 아는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없는 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의 상태에서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자유 속에서 하나둘씩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었고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진짜 내가 뭔지, 사춘기는 아니지만 뒤늦은 자아 찾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어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기에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화장이든 꾸밈이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서 저절로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의 나로 매일을 지내게 되었다. 너무나 편했다. 그저 너무나 편해서 왜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지 못했던 걸까 많은 회의감이 들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남들을 의식해서 만든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감을 인식했던 것 같다.
자아 찾기에 진심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1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을 만난 덕도 있다. 그들은 너무나 자유로웠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도 내가 하는 고민과 마찬가지로 나는 왜 이럴까 고민하고 남들 눈치를 보는 면도 당연히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그런 것들을 눈치 채지는 못했고 그저 그들의 자유로운 복장과 사고와 관계성과 문화, 그 모든 것들이 안 맞는 옷을 입은 내가 옷을 던져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고 화장을 하고 싶으면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 정치와 역사 이야기를 농담으로 주고받으며 웃을 수 있는 관계가 부러웠고, 일본 문화만이 아닌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굉장히 놀라웠다.
그들은 남이 바라보는 자신이 아닌 자기가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일단 자기 자신이 존재한 후에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필터로 밖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나도 없었고 모국에 대한 인식도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태도와 사고에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작았고 그들은 너무 컸다. 무엇이 작고 컸냐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존재감이나 그릇의 크기라고 해야 할까, 그게 너무 달랐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렇게 그들의 좋은 점을 흡수한 뒤 한국에 돌아왔다. 당연히 나는 달라져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내가 존재했고 나의 기준과 가치관 같은 게 생겼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귀국 후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렇다고 한들 내가 속한 세상과 환경과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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