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몸 이야기 2

    교환학생으로 외국 생활을 한 덕분에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뒤늦은 자아 찾기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했고, 좋아하는 것을 고르는 자유로움과 있는 그대로 존재함에서 오는 안정감을 얻었다. 그렇게 1년을 보냈고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진 상태로 귀국을 했다. 이대로라면 나를 마음껏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지, 순조롭지 않았다.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교에 돌아와 수업을 듣고 귀가하려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일본 빈티지 가게에서 산, 자수가 들어간 파란색 원피스에 독특한 별무늬가 들어간 레깅스 차림이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잠옷이니?” 너무나 당황스런 나머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머쓱해진 채 나는 가만히 서 있었고 내 머릿속에는 방금 그 애가 말한 “잠옷”이란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나는 주눅이 들었다. 나의 취향을 거절당한 느낌이었고 나를 부정당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거나 실행하지 못하고, 이렇게 해야 할까? 이렇게 해야 하겠지, 라는 판단 하에 옷을 입고 물건을 사게 되었다. 화장품 또한 다시 사게 되었고 맨얼굴로 밖에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기분으로 매일을 보내야 했지만 이것이 옳다는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거의 반년을 보냈다. 일본에서 자유롭게 나를 꾸미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며 지냈던 나날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런 원점에서 다시 멀어지게 된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다. 그날은 어김없이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00야 화장했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순간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화장을 하던 매일이었는데 갑자기 그 말을 타인을 통해 들은 순간, 현실자각을 했다. 화장이라는 게 너무 싫어졌다. 그리고 화장을 한 내가 싫어졌다. 나는 나를 위해서 화장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난 남을 위해서 나를 꾸몄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즐거움이란 없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자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말을 직접, 그리고 남에게 들은 것을 계기로 화장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화장을 하지 않게 되었고 화장품 가짓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피부를 가리고 덮고 색을 입히고 모양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피부 자체의 상태를 좋아지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로 제일 좋았던 점은, 이제야 내가 나를 제대로 가꾸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됨으로서 나를 알아가는 계기 또한 얻었다는 것이다. 눈이 어떻게 생겼고 코는 어떻고 웃을 때 눈 모양은 어떻고 어디에 주름이 지는지 천천히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옷차림도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단순해졌다. 유행하는 옷을 사지 않게 되었고 남들이 입는 옷 보다는 내가 입고 싶은 옷,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목이 짧으니까 브이넥을 입으면 되고, 밝은 색의 옷을 입었을 때 안색이 밝아지니까 되도록 밝은 색 옷을 고르자. 표준체중이 아니라고 해서 체형을 가리기 위해 벙벙한 옷만 입으면 부피가 더 커 보인다 하니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힌 옷을 입어보자. 이마가 넓다고 해서 앞머리를 길게 자르지만 말고 아예 짧게 잘라서 드러내보자. 나를 부정하면서 아니다, 틀리다, 이상하다 생각 말고 귀엽다, 개성 있다, 예쁘다 긍정적인 말을 나에게 건네자.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내 가슴이었다. 초등학생 때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뛰기도 자주 뛰고 피구며 축구며 운동을 가리지 않고 남자 아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사람은 움직이는 것에 저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이 내 가슴을 흘깃거리는 걸 눈치 챈 적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가슴이 큰 것이 문제로구나, 왜 나는 가슴이 큰 걸까, 라며 부정적인 감정이 내 안에 가득차게 되었다. 더군다나 양쪽 가슴의 크기가 달랐던 탓에 브래지어 또한 적절한 사이즈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슴 양쪽의 크기가 다른 사람은 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난 이상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도 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과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내 몸의 여러 의문점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이래저래 나는 내 가슴을 좀처럼 좋아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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