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다음 세상

 

    나의 이십대는 그랬다. 내면의 방황이 깊어질수록 가야할 곳과 해야 할 것이 늘어났다.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어떤 일이든 너무 무리했고, 자주 번아웃을 겪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내 번아웃을 겪는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삶은 언제 끝나지?’ 한 톨의 아쉬운 것도 아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는 듯이. 나에 대한 소중함, 나를 아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런 것들이 모두 멸종해버린 일종의 ‘정서적 아포칼립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주어진 명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나의 삶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내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새로운 길을 걸었다. 나는 자연의 섭리라는 물레바퀴에 올라타 있는 것이다.

지난 5~6년 남짓한 시간 나는 '하나의 구간'에 머물렀다. 우울하고, 불안증에 시달리며, 자기를 위할 줄 모르고, 남 역시 위할 줄 모르는. 그러다 결국 다시 혼자가 되고, 우울해지고, 불안해지는 그런 '구간' 말이다.

    하지만 그 어두운 시절에도 내게는 황금 같은 보물이 있었다. 바로 영혼의 결이 맞는 친구들이었다. 결이 맞는다는 느낌은, 취향이 같거나 생긴 꼴이 마음에 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할 때면 세상이 주는 복잡함과 불안을 잠시 치워두고 오롯이 나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일종의 인생 휴식처와 같았다.

    그런데 '그 구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영혼의 친구 중 한 명을 잃게 되었다. 완벽했던 나의 오아시스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 했다. 그가 떠나고 정신없이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학원도 다녔고, 사업자를 내고 장사도 해봤고, 글도 썼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났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앎과 배움으로 망가진 오아시스를 수리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때문에 애초에 내가 했어야 할 그 일을 친구들에게 떠넘겨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의 의지나 선택이 고려될 기회조차 박탈 당한듯 허망하게 떠나버린 친구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한 선택권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어느 선을 넘어가면 자연의 섭리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되겠지만, 적어도 그 선에 다가가기 전까지 우리는 무한한 행동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나의 삶은 순식간에 '다음 구간'으로 넘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친구들이 내게 던지던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날이 이어졌다. 나의 생활, 내가 가진 생각,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 등 모든 것이 조금씩 모습을 바꿨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친구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렸다. 분명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운 것도 있지만, 실은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친구들이 대신 도와주던 나를 마주하는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더욱 슬피 운 것은 아닐까 하고.

    물론 존재를 떠나보내며 가지는 생각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냥 그에게 조금 미안했을 뿐이다. ‘나 사실 네가 불쌍한 게 아니고, 너를 잃은 내가 불쌍해서 운 것 같다.’ 그리고 분명 그는 이런 내 마음 역시 … ‘음. 그럴 수 있지.’ 라며 이해해줄 것이므로.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나는 앞으로의 내 인생을 절대 허투루 살 수 없다는 각오가 돈다.

    나는 이제 '다음 구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 삶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어떤 삶을 살길 원하는가?’ 나는 아마 '이곳'에서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고, 실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릴 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서 듣기를 화가는 가난한 직업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장래희망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써서 보여줘야 한다면 그때마다 적당해 보이는 직업을 써서 냈다. (화가라고 쓴 것 말고는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적당히 써서 냈나보다.)

    엄마는 내가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 도움으로 고등학교 때 미술 대학 입시생활을 했다. 입시를 할 때도 여전히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연필을 깎는 일부터가 예술로 느껴졌고, 시원하게 깎은 연필로 소묘를 할 때면 매번 완전히 몰입하여 시간을 잊기 일쑤였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했는데, 성적에 맞추다 보니 웬 ‘금속공예과’에 입학해버렸다. 다행히 만드는 것에도 취미가 있던 나는 제법 잘 적응했고, 그곳에서도 ‘체이싱(금속 공예 기법 중 하나) 작가’를 내심 꿈꿨다. 하지만 그때도 집에서 어느 정도 받쳐주지 못하면 작가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업실을 구하고, 장비를 사고, 초반에 소득이 없어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혼자 대학원 학비를 감당하고 공부를 할 만큼 금속공예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므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무도 몰래 존재를 감췄다.

    또한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남긴 빚으로 인해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으므로 졸업한 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엄마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스물셋의 나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고 싶은지보다는 돈이 절대적으로 중요해보였다.

    결국 나는 그림도, 공예도 모두 붙잡지 못했다. 그것들은 내 삶에 찾아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회사에 들어갔고 그곳의 일을 어떻게든 받아들였다.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고 그에 맞는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어떻게든'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어떻게든 하자고 밀어붙이면 결국 누군가는 불필요한 희생을 하게 된다며.)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고, 나는 밤마다 졸업반 시절의 그 선택을 후회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당장 길거리로 쫓겨날 만큼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시간을 가지고 더 신중히 생각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 해도 비슷한 선택을 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자칭 어둠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뒤의 삶이 감히 그 어린 시절에 도전장을 내밀만큼 어둡고 또 어두워져만 갔던 것이다.

    어릴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받았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 것인데 어째 후자가 더욱 잔인하고 몹쓸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발상지를 살펴보면, 결국 내가 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백그라운드가 보인다.

    이런 일련의 되돌아봄은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도, 무언가를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다음 구간'에 넘어왔다는 확인의 표시로 적어 내려간 것에 가깝다. 나는 이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꾸려 어떤 사람으로 살길 원하는지 나 자신과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눌 준비가 됐다.

    자신을 믿고 당당하게 선택하며, 책임감을 갖고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일 때 내 삶은 조금 더 나다워지는 게 아닐까. 물론 지난 날 나의 삶 또한 어느 면에서는 충분히 나다웠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시간 덕분에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겠노라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부풀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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