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 번째 이야기 / 12월 둘째 주



     ‘엄마’.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말. 어쩌면 평생 가장 많이 내뱉는 말. 해를 거듭할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말.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말. 존경하는 만큼 미안하고 고맙고 또 미안해지는 말. … 사랑하지만 좋아함에는 자신 없는 말.


    내게 엄마(그리고 아빠도)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았’다. 그렇게 느‘꼈던’데는 여러 서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22살의 일이다. 


    “엄마야. 아빠가 일하다 갈비뼈 세 개가 부러졌어. 그래서 지금 입원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공사 현장 나갔는데 기계가 아빠를 못 보고 쳤나 봐.”


    “하… 산재는?”


    “산재는 안 해주는데 현찰로 사백만 원 준데.”


    “엄마, 그게 말이 돼?! 사람이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는데 사백만 원을 받고 끝낸다고? 이건 산재처리를 해야지.”


    “… 모르겠네. 저쪽에서 그렇게 하자고 하는데.”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하려고?”


    “이미 거기 팀장이 와서 아빠랑 그렇게 한다고 얘기했는데.”


    “엄마, 내가 지금 내려갈게.”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그 길로 곧장 시골에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 내내 어릴 때 보았던 효자 이야기를 다룬 만화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이랬다. 어느 날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금을 물에 담그라고 했는데, 이 효자는 아버지의 판단이 상식적이지 않음을 알면서도 시키시는 대로 소금을 물에 담근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라며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 만화가 준 교훈은 어린 내게 강렬했다.  


    이 이야기와 내 상황이 겹치면서, ‘사백만 원에 합의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걸까? 부모님도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렇게 한 것인데, 어린 내가 부모님의 선택을 뒤집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결론은 ‘아니다. 내 판단을 믿자, 사백만 원에 합의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진정으로 부모님을 위하는 것은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을 방관하는 게 아니라 옳은 선택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다.’


    세상은 법 없이도 살 우리 부모님의 가치를 인정하기는커녕 우습게 알고 눈을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 가는 것만 같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대상이 파렴치한 공사팀장인지 멍청하게 느껴지는 부모님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러나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급선무는 아니었다.


    자, 이제 그 공사팀장을 직접 대면할 것인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젊고 어린 여자애라고 무시할 게 뻔하다. 아빠가 나갔던 현장과 비슷한 일을 하시는 친구 아버지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과연 공사팀장은 그 아저씨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결국 산업재해로 합의되었다.


    부모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에는 크나큰 고통이 따르지만 인정하고 나면 차라리 속이 편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부모였다. 자신을 위로하고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엄마 아빠가 없어도 내 삶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했지만 많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내가 도움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때로는 버겁기까지 했으니까.


    별안간 아빠가 떠나시고 이러한 내 생각은 꽤 큰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너무나 당연해서 인식하지 못했을 뿐, 부모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시곤 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떠나신 지 7개월이 지났다. 이 시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퇴사를 하고, 시골에 내려오고, 집을 치우고, 중고차를 사고, 농사를 하고, 요리를 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 해 본 적 없는 경험인데, 엄마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요즘 엄마랑 함께하는 시간과 사건이 많아지면서 엄마에 대한 생각도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아리송한 것은 그럴수록 엄마를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전에도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런 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면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 존재는 다층적이다. 요즘은 내가 편한 대로 엄마를 규정짓지 말고, 엄마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익히려 애쓴다. 야속하게도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사람은 누구와 같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라이프스타일대로 지내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는 것이다. 


    내가 처한 삶의 위치가 내가 추구하는 지향과 일치하는지를 고민했다. 짜증 나고 힘든 순간들이 있지만, 아직 참을만하고 이 위치에서 실현할 가치와 수행이 있다는 것이 고민의 결과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쁜 겨울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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