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두 번째 이야기 / 12월 셋째 주
- 리얼 포레스트: 조이(연재 종료)
- 2018. 12. 25. 10:56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동지를 앞두고 마을에서는 대동회가 열렸다. 2018년도의 임기를 지낸 이장님의 수고를 헤아리고 2019년도의 이장과 부녀회장이 선출되는 자리였다.
이장님은 면사무소에서 전달되는 소식들을 마을에 전해주고 처리하고, 이렇게 해마다 열리는 대동회에서 마을 식구들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에 관여하며, 이웃 마을의 이장들과 협업해서 지역사회의 일을 하기도 한다. 살아생전 한량이시던 아빠는 이장씩이나 할 위인은 못 되었지만, 마을에서 젊은 남성에 속했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어 그것만으로 반장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어릴 때는 세금 고지서 따위가 면사무소를 통해 이장에게 전해지고 마을의 반장이던 우리 집에 전해졌다. 그럼 저녁을 먹고 아빠와 언니들과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집집마다 고지서를 전달해 드리곤 했다. 풀벌레 소리와 포도 향기에 사로잡혀 걷던 그 밤공기가 아직도 선명하다. 어린이는 존재만으로도 신성하고 경이로운 에너지를 내뿜는다. 모든 것들을 처음 보듯 신기해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망울을 지닌 어린아이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의 경험을 잊은 어른들을 일깨우곤 한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바라만 보아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가방이든 호주머니든 어디든 어린아이를 위한 사탕 하나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런 어린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거느리고 마을을 도는 것은 아빠에게도 큰 즐거움이며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마다 아빠의 표정은 늘 밝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채 휘파람도 불곤 하셨다.
“너희 아빠 있었을 때는 반장이라고 이세도 안 냈었는데, 올해부터는 이세도 내야 하네.”
대동회를 앞두고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엄마의 말처럼, 연말인 요즘은 더욱더 아빠의 부재가 실감 난다. 해마다 대동회에서 이장님에게 드리는 약간의 사례를 위해 집집이 4만 원씩 걷는다. 평생 만년 반장으로 지내신 덕에 해마다 이 이세에서 제외되었는데 올해부터는 우리도 포함되었다.
사춘기 때는 이장도 못 하고 만년 반장이던 아빠가 한심하고 답답했다. 이장도 아니면서 반장 그 잘난 것 뭐 하러 하냐고 그랬다. 괴팍한 구석이 있던 할머니는 이장은 하는 일이 많아 고생스러운데 그에 비해 푼돈이나 받는다고, 차라리 일 적게 하고 이세도 안내고 명절마다 선물도 받는 반장이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나는 그럴 거면 아예 반장도 하지 말라고, 아빠 나이도 차는데 만년 반장이 뭐냐고, 쪽팔리지도 않느냐고 대들었다. 우리 집은 남의 집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차도 없고, 외식도 못 하고, 여행도 못 가고, 쇼핑도 못 하고… 이런 결핍은 결국 가족 구성원들을 향한 원망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사람마다 주어진 상황과 처지가 다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그저 함께하는 이들을 아끼며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을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욕심이 없고 순진한 구석이 많으셨던 아빠는 반장이라는 직책에 꽤나 만족하셨다. 막내딸인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때론 우습게 여겼던 모습에 속상했을 거다. 아빠는 지난봄을 기점으로 비로소 만년 반장에서 해방되셨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해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것을.
마을의 새로 선출된 이장은 우리 언니들의 친구네 아빠이면서, 우리 아빠의 동창이기도 한 분이 되셨다. 그 잘난 이장 안/못해도 좋으니 아빠가 이 연말에 함께 계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손주들 재롱도 보시고, 아빠가 원하던 대로 우리 차를 타고 가족 여행도 가고, 외식도 하고, 양복도 사드릴 수 있을 텐데. 엄마랑 제주도도 다녀오실 수 있을 텐데. 이뤄질 수 없는 끝없는 바람에 마음만 괴롭다. 연말이 되니 아빠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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