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한 번째 이야기 / 12월 셋째 주
- 리얼 포레스트: 조이(연재 종료)
- 2018. 12. 18. 09:53
예년보다 따뜻했던 초겨울 날씨가 이어지다가 대설이 지나자 꽤 추워졌다. 비로소 겨울이 실감 난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추위에 대비하는 일만 남았다. 날이 추워져서 들판 일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농한기에 들어선 것이다. 많아진 시간 덕에 요즘에는 조금씩 요리를 한다. 지난주 글에 첨부했던 소고기뭇국이 그 예다.
야간에 일 다니시는 엄마는 아침 8시쯤 귀가하셔서 주무시고 오후 세 시 반쯤 식사 하신다. 엄마에겐 점심도 저녁도 아닌 그 시간에 하는 식사가 아침이기에 되도록 챙겨드리려 애쓴다. 회사에서 자정에 보통사람들의 점심 같은 식사를 하시는데 엄마는 밖에서 잘 먹는다며 집에서는 매번 대충 챙겨 드신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약간의 당뇨와 혈압이 있는 엄마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딸의 입장에서도 엄마의 식사를 챙겨드리는 게 도리라고 느껴져서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도 아침에 거의 억지로 일어나 학교에 가서 급식으로 점심을 먹고,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그런데 대부분 저녁을 밖에서 친구들과 편의점과 분식 등으로 건강하기 어려운 음식으로 대충 때우다 보니 얼마 전에 지방간 판정을 받았다. 동생에게 건강한 식단을 챙겨줘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요리라는 게 만드는 이의 입맛에 그 요리가 꽤나 만족스럽고 또 즐거워야 계속할 수 있지, 요리를 해야하는 이러 저러한 당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엄마와 동생의 건강을 위해서 요리를 하자, 라고 생각하면 몰려오는 귀찮음에 요리를 못하거나 나아가 내가 내 앞가림에 집중해야지 이 시간에 가족 뒤치다꺼리나 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밀려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많은 갈등 끝에 한 요리를 엄마와 동생이 잘 먹어주면 요리를 하는 맛이 생긴다는 것이다! 엄마랑 동생이 음식을 잘 먹으면 이는 엄마와 동생의 건강을 위해 요리를 해야 하는 당위와 나 자신도 요리가 재미있고 보람차게 느껴지는 흥미, 이 두 가지가 다 충족된다.
어릴 때는 집에서 할머니랑 언니들이랑 하루가 멀다 하고 김치부침개를 부쳐 먹고, 겨울이면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호떡, 꽈배기도 만들어 먹고, 칼국수도 면을 직접 반죽하여 면을 만들어서 끓여 먹기도 했다. 한창 성장기의 우리는 무섭도록 먹었고, 대식가인 아빠도 기세를 보태면 우리 집 냉장고는 그 무엇이든 동이 나곤 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는 요리를 함에 있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무엇이든 했다. 어릴 때는 그저 식구들이랑 함께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컸고 삶에서 큰 고민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는 요리를 해도 먹성 좋게 먹을 식구도 없고 나도 양이 많지 못하다. 무엇보다 요리를 하기에 앞서 그 메뉴와 재료, 소요 시간에 대해 많은 고민이 솟아난다.
언젠가 갔던 미술관에서 아이와 어른에게 물감을 주고 벽이나 바닥에 맘껏 칠하라고 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작가는 영상에 대해, ‘어린아이는 자연스레 행위를 하나 어른에게서는 고민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보인다’며 우리 어른들이 때론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을 멈추고 살아갈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적당한 조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힘을 빼고 살아가는 것. 인생에서 한 번도 배운 적 없고, 시도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늘 목표를 정하여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을 삶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배웠다. 하지만 삶의 자세는 옳고 그른 것보다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맞춰 다양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주어진 형편과 처지를 열등감과 우월함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시골에 내려와 고추 농사와 씨름하고 오이와 가지, 참외와 토마토를 따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 계절을 보냈다. 손톱이 까맣게 물들도록 포도알을 따내며 포도즙을 만들고, 코끝의 차가움을 느끼며 운전에 익숙해지는 가을을 지냈다. 이제 고요해진 들판을 마주하고 있다. 그간 애쓴 자연은 긴 겨울을 포근히 덮어 줄 눈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눈이 와야 대지에는 충분한 수분이 공급되어 이듬해 농사가 잘된다.) 자연 앞에서는 그 지혜로움에 매번 마음이 겸허해지고 동시에 그 위대함에 충분한 생명력을 느낀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하는 이 겨울이 그 어느 해보다 웅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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