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 2019 새해 첫날

뜻하지 않은

   연이은 한파에 결국 수도가 얼고 말았다. 날이 상당히 추울 때는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게 틀어둬야 한다는 것을 엄마도 동생도, 나도 그 누구도 유념해두지 못했다. 한량 같던 아빠는 집 안 구석구석을 손보지는 못했지만, 유지 정도의 관리는 해 오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는 겨울에 그 빈자리가 더욱 실감 난다.  


    “여보세요? 어머님, 아침부터 죄송해요. 집에 수도가 얼어서… 혹시 설비 잘하는 데 아세요?”


    수도가 얼어버린 곳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온종일 씨름하고 가신 설비 아저씨를 겪고 결국 친구 어머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고, 진작 말하지. 알았어, 지금 아저씨 가시라고 할게.”


    실은 친구 아버지도 설비 일을 하신다.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물을 제대로 못 쓰는 날이 잠깐이면 어떻게 견뎌보더라도 기약 없이 버틸 수만은 없는 문제였기에 두 눈 꼭 감고 전화를 드렸다. 친구 부모님은 늘 나의 걱정과 달리, 시원시원하게 기대했던 결과 이상으로 일을 척척 처리해주신다. 역시 이날도 그러했다. 


    “안녕하세요. 조이 친구 아빠예요. 조이가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이제 보니 어머니 닮은 것 같네.”


    “안녕하세요, 조이 엄마예요…”


    “엄마, 수도가 안 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대. 보일러실 옮길 때 배관을 다 엉망으로 마무리 해뒀더라고. 그리고 집 전기 공사 삼백 주고 했다고 했지? 아저씨가 이렇게 노출로 하면 70이면 할 거래.”


    “엄마는 잘 모르니까. 네 아빠가 하자고 한 사람한테 그냥 했지. 그것도 아는 사람이라고, 옆 동네 사람인데…”


    “어머니, 우리 딸 친구면 내 친구예요. 조이야, 아저씨가 아빠 역할을 대신 해 줄게. 앞으로 아는 사람 다 끊어. 그런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고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그런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야. 일단 오늘 물 나오게 해주고 떨어진 문 달아줄게요. 그리고 어머니, 집 옆에 밤나무 좀 이쁘게 가지치기 좀 해도 되겠어요? 나무가 무서워, 죄송해요. 죄송한데, 나무가 축축 늘어져서 꼭 서낭당 나무 같아요. 이쁘게 두 개, 딱 두 개만 잘라도 되겠어요?”


    “네.”


    수도가 언 자리를 찾아보니 예전의 보일러실이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도 않는 나무 보일러실을 만들면서 예전의 기름 보일러실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것도 마을에 들어온 사기꾼 목수 부부가 할머니랑 아빠를 꾀어서 난방비 안 든다며 나무 보일러실을 설치하게 했었다. 이 역시 집안 전기 공사와 마찬가지로 70만 원이면 할 일을 삼백만 원에 했었다. 양심도 없는 이들에게 솜씨라고 있었을까. 보일러실을 옮기면서 배관을 다 엉망으로 해 둔 것이다.


    집의 안팎을 정리하는 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숙제와 같았다. 집 안 청소는 내가 어떻게 사부작거리며 좀 해낼 수 있는데, 각종 잡동사니와 쓰레기, 풀들이 뒤엉킨 마당을 치우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언젠가 아저씨게 이런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이날 아저씨는 엄마를 만나 찬찬히 안심시키고 이해시킨 후, 오전에 수도를 고쳐주시고 오후에 포클레인으로 마당의 잡동사니와 풀을 싹 긁어내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아저씨의 사려 깊은 배려와 이해심 덕분에 마당을 치우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가슴이 뻥 뚫려 숨을 쉬기 어렵고, 고통으로 눈물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괴로운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이 참 가혹하다 느껴진다. 그런데 또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뜻하지 않은 큰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그것은 마치 긴 터널 끝의 햇살 같기도 하고, 긴 가뭄을 해소할 단비 같기도 하며, 소담스럽게 차려진 따스한 밥상 같기도 하다. 받은 도움에 보답하는 방법은 나 또한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베푸는 것임을 가슴에 새기며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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