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3편
- 갤러리 친절한: 안친절(연재 종료)
- 2018. 11. 28. 08:55
- 음. 벽화라고요. 잠깐 들어와 봐요.
원이는 다짜고짜 동사무소 직원입네 하고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벽은 온통 진한 색 나무 판넬로 감싸져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부잣집 친구네 집이 이런 느낌이었지... 뜨거운 낮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내부는 어둡고 서늘했다. 입구에 늘어선 하얀 리본 달린 슬리퍼에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실 곳곳에는 상장과 감사패, 온갖 종류의 기념사진들이 가득했다.
- 음. 내가 말이죠. 벽화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아요. 사실 우리 사돈처녀가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해요. 알죠? 추계예술학교! 나도 어려서 음악을 시킬까 미술을 시킬까 할 정도로 집안 자체가 예술에 조예가 깊어요. 그런데 벽화라는 게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이나 음 뭐랄까. 지역적으로 수준이 높지 않은 곳에다가 그리는 경향을 내가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우리 아들 말이! 벽화를 그려야 지역민들끼리 화합정신이 생겨나고. 뭐랄까 지역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생긴다는 거예요.
집주인은 대한민국에서 벽화가 그려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하기 시작했다. 말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원이의 허벅지를 옆에서 슬그머니 찔렀지만, 입을 꾹 닫고 연신 끄덕이기만 했다.
- 그리고 우리 집 벽에 그렸다 쳐봐요. 사람들이 거 멀리서 와가지고 벽에 기대서 사진 찍고 흘깃댈 거 아니에요. 옳지 못해요. 벽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 퍼스널한 공간의 일부고, 아무리 퍼블릭한 공간과 마주한대도 엄연하게 내 집의 일부란 말이죠. 구에서 왔다니까 하는 말인데 이런 거 하지 마요. 왜 세금 써가면서 일부러 동네 후지게 만들어요. 어디 강남에 벽화 그려진 데 있어요? 이걸 하면 가뜩이나 이미지 실추에요.
글렀다. 빨리 다른 집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앞에 있는 매실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어머! 한 잔 더 마셔요. 이게 매실이 집에서 담근 거라 단맛이 좀 약해도 개운한 맛이 있어요. 에구. 어린 아가씨들이 고생이네. 그래도 얼마나 기특해요. 어린 나이에 이렇게 나랏일도 하니 말이에요. 힘들겠지만 다 지역민을 위해 긍정적으로다가.
이후로도 매실차가 2번 더 나왔던 것 같다. 벽을 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집주인은 미대 나온 사돈의 팔촌까지 끄집어냈다. 대한민국에서 미대 나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여름이라 그런지 6시가 훌쩍 넘었지만 날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심 선생은 뒤풀이를 한다며 모 식당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집이 멀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가 지친 오늘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배고파하는 원이만 보내놓고 지하철을 찾아 하염없이 걸었다. 슬슬 어둑해지는 여름 밤거리에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둑한 도로가를 걷다가 갑자기 눈앞에 희뿌연 벽이 나타났다. 칠이 된지 좀 지나서인지 번들거림은 사라졌지만 마치 젯소를 발라놓은 캔버스 같이 매트한 촉감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이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 벽을 향해 달렸다.
"선매동 백화노인정"
벽면에는 기다란 나무 현판이 달려있었다. 백화라는 이름답게 뽀얀 얼굴을 가진 벽이 달빛 아래 해사하게 서 있었다. 드디어 벽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