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2편


    나는 마을 벽화를 싫어한다. 솔직히 혐오한다. 가득이나 조악한 그림에 심기가 불편한데, 명분까지 있으니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 동네에 <동네 문화 가꾸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요상한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앞장서서 초를 치고 다닐 생각이다. 여기는 왜 앉아있냐고? 일당 좀 챙겨준다는 말에 2시간 걸려 왔는데, 하필 이 더운 날, 동네 담벼락 찾아다니게 생겼으니 그런 질문은 삼가줬으면 좋겠다. 충분히 힘겹다.


    내 비록 지방 예고출신이긴 하지만 나름 자부심을 가질 만한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성한 나름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술관에서 어시스턴트도 했었다. 고작 두 달 단기 일용직이지만 학벌과 능력들이 넘쳐난다는 미술 인력 중 뽑힌 거니까 그래도 자랑할 정도는 된다.


    원이는 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났다. 여기도 원이가 불러서 오긴 했지만, 실상 그 친구에게도 현장에 대한 귀띔이 전혀 없었던 눈치다. 바쁘지도 않은 미술관에서 종종거릴 때 보다야 일당이나 근무시간 등 조건자체는 좋지 않으냐며, 원이는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물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 안다. 알아. 너 눈 여기 달린 거.


    원이 내 정수리를 살짝 두드렸다.


- 우리 아빠가 나 미술 시킬 때는 더운 날은...


- 더운 날은 에어컨 밑에서, 추운 날은 히터 앞에서 일하라고? 


- 아니. 더운 날은 일 안하고, 추운날도 일 하지 말라고. 


- 아빠 귀여우시네. 전혀 예술에 대해 모르셨구나.


- 응. 그냥 작업실에서 놀다가 작업핑계로 바람 좀 쐬고, 그리고 밤에 그림 좀 그리는 일인지 아셔. 그러다 유명해지면 돈 많이 벌고. 어쩌면 아버지가 원했던 생활인지도 모르지.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동네를 어슬렁거리는데, 남의 동네라 그런지 지도를 볼 줄 모르겠다. 원이 말대로 내 눈은 한없이 올라가 버렸고, 지겹도록 삶의 질을 따져대니, 남들처럼 주중에 돈 벌고, 주말에 쉬고, 돈 모아 결혼하고 애 낳고 늙어가는 일상에서 멀어져버렸다. 아버지 말처럼만 산다면 인생 대 성공이다. 하지만 과대평가된 재능은 입학하기 무섭게 탄로 났고, 날고 기는 동기들 사이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자존감은 이내 바닥으로 파고들어 단단한 암석아래 처박혔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수리까지 올라간 눈은 내려올 생각을 않고, 미술관 일을 시작하면서는 손과도 멀어지고 말았다. 


    어찌 되었든 갤러리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흰 벽만 보면 가슴이 뛰었다. 작가만의 엄격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한 오브제. 그 콤포지션의 현장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을 쓰다듬고 있으면, 마치 현실과 예술을 가로지르는 비현실의 조각이 손을 가르는 것 만 같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위대한 업적. 어쩌면 나는 화이트 큐브와 사랑에 빠졌다. 미술관 벽은 푸르스름한 묘한 느낌이 있다. 뜨거운 빛을 뿜지만 몸체는 차디찬 led조명이 무심한 듯 늘어서 있는 풍경, 그레이 톤 시트지에 새겨진 명조체의 나열. 공간의 정점은 어쩌면 작품이 아닌 벽면을 가득 채운 아티클인지도 모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물성이 있는 사물에 시간과 역사를 부여하여 영원을 약속해주는 아티클은 존재자체가 예술인 것이다.


- 야! 정신 차려! 


    원이가 잡아당겨 도로에 서 있던 나를 끌어당겼다. 


- 아니. 인도를 이렇게 좁게 하면, 당연히 사람이 찻길로 가지. 어디로 가냐? 저 놈의 차를 확!

갤러리를 사랑하는 내 눈앞에 지린내가 풍기는 더러운 벽만이 서 있다. 아니 그 전에 시멘트가루 부스러지는 벽이라도 좋으니, 벽을 허락 해줄 마음씨 좋은 우리의 이웃을 찾아야 한다.


- [딩동]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잠깐 시간을 내주시면, 이번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싶은데요. 


- 공공 뭐라고요?


- 프로젝트요. 구청에서 이번에 마을 공동체 형성을 위해 커뮤니티...


- 안사요. [딸각]


    멘트가 입에 달라붙지 않아서인지 영 매끄럽지가 않다. 언제 그 많은 곳을 다 돌아볼 것인가. 한 번의 시도만으로도 어깨가 축 처진 나와 달리, 저 멀리서 원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뛰어왔다. 


- 세탁소 가자. 저 담벼락 주인이 세탁소 한대. 저번 달에 누가 차를 대다가 후진을 잘못해서 벽이 무너졌는데, 보상받아서 새로 했단다. 벽 상태가 좋아서 허락 안할 수도 있는데. 우선 가보자. 


문을 열자 스팀다리미에서 뿜어 나온 습기와 오래도록 갇혀있던 온갖 세탁소 냄새들이 몰려왔다. 


- 다 좋아! 다 좋은데. 그림 그리는 것 자체는 오케이. 그런데 핵심은 누가 그리느냐! 학생들도 미대 다닌다니 알겠네. 거 뭐야 통영인가에 벽화마을 있잖아? 거기가 보긴 참 좋지. 그런데는 할 만 하다 이거야. 대충 슥-슥- 문대도 멀리서 보면 예술이구나 할 거라고. 그런데 여긴 주택가란 말이지. 관객이 무조건 가깝게 본다 이 말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누가 그렸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요. 설마 아가씨들이 그리는가? 대학 어디 나왔어. 홍대? 서울대? 뭐 하긴 미대 나와도 그림 그리는 솜씨는 별개라. 내가 그쪽을 좀 알지.


    원이는 집안에 미술인이 있냐며, 어쩐지 세탁소 배치가 남다르다며, 걸려있는 달력까지 칭찬해대기 시작했다. 원이가 마음이 급하긴 한 것 같다. 


- 우리 조카. 그러니까 처형네 막내가 그림을 제법 그려. 마누라 쪽이 솜씨가 다 좋거든. 그런데 말이지. 미술이란 게 대학 공부랑은 영 딴 판이란 말이지. 위대한 화가를 보라고. 대학 나온 사람 있어? 죄다 독학이여. 독학. 그게 뭔 소리냐 하면, 예술이란 게 자신의 울분과 희열을 화폭에 담아야 하는데. 거 머랄까 김창렬의 물방울 그림 같은. 아! 내가 그 양반을 참 좋아해서 말이지. 그런 스타일로 그려주면 모를까. 머랄까 벽이 항상 촉촉한 것이 마치 눈물인지 이슬인지가 또로록 맺혀서 흘릴랑 말랑 한다는 거지. 캬!


    가수 김창렬 말하는 건가? 아무튼 그 창렬이란 사람을 불러오지 않고서는 도저히 벽을 내어줄 것 같지 않았다. 세탁소 주인은 유명 작가의 프로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저 그런 작가가 어설피 포트폴리오를 내밀어 봐야 어림없단 뜻이다.


    이런 식이라면 동네 주민을 백날 만나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망해버려라!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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