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1편



- 소개는 이제 마치고요. 이쪽 어머님부터 어떻게 벽화교실에 참여하게 되셨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심 선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단박에 일어났다.


- 우리 집 담장이 너무 흉해요. 길가에 있는 단독이니까 그렇다고는 하는데, 관리를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이꼴 저꼴 안 보려면 애들 어릴 때 그냥 나갔어야 했는데. 우리 선매동이야말로 젠트리. 그 암튼 젠트리의 피해자라고요.


- 젠트리피케이션 말씀이십니까? 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라고 느끼시는건지 여줘봐도.


- 젠트린지 젠틀인지 암튼간에 사는 사람들이 힘들면 젠트리지! 교육 핑계로 그냥 강남갔어야 하는데. 우리집 양반이 애들 공부잘하는데 뭔 말도 안되는 소리나게 하는 통에. 늦게 이게 웬 난리 인지. 사실 애들이 공부를 좀 잘했어요. 그래서 할 말은 없었지만.


순간 심선생이 틈을 파고들었다.


- 중요한 개념이 나왔죠? 젠트리피케이션 들어보신 분도 계실테고. 당장 우리 선매동도 선리단길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잖습니까?


겨우 가져온 말이건만 도로 뺏기고 만다.


- 아직 안 끝났다니까! 암튼 큰애 선매초라고. 유명한 사립이 있어요. 애 아빠가 학교는 집근처에서 다나는 법이라고 거기 보낸다고 온 거니까 벌써 30년이 넘었네. 우리 딸이 대기업 다니다가 애 키운다고 관뒀는데.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하니까 넌 밥 먹고 공부만 해라 하고 키웠더니 지 손으로 살림을 못하네! 내 탓이요 하고 가끔 도와주는데. 애가 툭하면 학장동 로열팰리스서 지 차 몰고 애 태워서 선매동까지 오는 거야.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한마디 거든다.


- 젊은 사람이 학장동 로열팰리스 살면. 좋은 데 사네! 이번에 역 완공되면 3, 4억은 그냥 오를 텐데...


- 좋은 데 살면 뭐해요. 좀 시원하게 산다 싶으면 관리비 돈 백이 그냥 나가요. 그래서 내가 우리 집이 구옥이라도 시원하니까 이리 와라. 엄마가 봐주마 했지. 내가 요 며칠 애를 재우는데 겨우 입 오물거리는 것이 툭하면 “할머니 지지냄새나 냄새나”하는데 정말 무슨 꼬릿한 냄새가 담벼락에서 계속 나는 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뭘 버리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여기가 핫플따구인가 되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동네를 헤집고 다녀서 그런다는데. 내가 보기엔 아냐! 분명히 여기 사는 사람들 짓이라구요. 한번은 아주 화가 치밀어 가지구 숨어서 봤어요. 앞집, 옆집, 뒷집 할 것 없이 죄다 우리 담벼락에 버리는 거야. 빌라 들어서고는 더 해.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바로 말을 막았다.


- 아줌마도 집 팔고 따님 사는 아파트 가세요. 보니까 그쪽 다 빌라촌 되게 생겼구만. 그리고 요즘 빌라 다 버리는 데 따로 있어요. 외부인들이 버리는 거구만. 괜히 빌라 사람 잡고 그래요?


- 아가씨가 빌라를 사니까 그런 소리 하는지 몰라도.


- 저 빌라 안 살아요. 그냥 무조건 빌라 탓하는 게 좀 그렇다는 말이죠.


자칫 싸움이 날 기세다. 멀리 있던 생활지원팀장이 단번에 다가 왔다. 


- 아이고. 박여사님. 내가 다 알지요. 그래도 박여사님 덕분에 그 골목이 깨끗한거 제가 다 알죠. 계속 하시던 말씀 이어 하십쇼!


기분이 살짝 풀린 박여사가 말을 이어갔다.


-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빌라! 아! 한번은 멸치같이 생겨먹은 젊은 남자가 뒤쪽 빌라에서 담배물고 와서는 봉다리 큰 걸 냉큼 버리는 거야. 무슨 똥 기저귀를 산더미같이 모아다가 버리는데 그게 냄새가 좀 심해요? “그렇게 아끼는 걸 집구석에서 껴안고 살지 왜 여기다 버리냐” 하니까 요것이 “그럼 이걸 여기 말고 어디 버려요?” 하는 거야. 부아가 치밀어서 그날 우리집 담벼락에 있는 봉투란 봉투는 다 뜯어서 주소 다 찾고 집 앞에 가져다가 죄다 부어버렸어. 그랬더니 미안하다고 하는 놈 하나 없어. 아줌마 땅이냐고 도리어 큰소리라. 어휴. 그날 경찰 오고 난리도 아녔어요. 솔직히 나는 어디 한국 티비 인터뷰라도 올지 알았네. 내가 시사쇼! 통큰 정치 이걸 진짜 좋아하거든. 거기 엠씨보는 양반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이번에 시장선거 나가면 내가 진짜 앞장 서 운동할거야!

 



어느새 심 선생은 초점 없는 눈으로 연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말 끊을 타이밍을 못 잡은 듯해서 그냥 나서기로 했다.


- 벽화를 그리면 그런 일이 줄어들까요.


지친 사람들이 슬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몇 명은 이미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 내가 선매동 가정집에서는 락스를 가장 많이 쓴는 사람일거에요. 그게 쓰레기 냄새 뿐 아니라, 술 처먹은 인간들이 지나다가 꼭 거기다 싸질러. 이번 여름이 좀 더워요? 어제도 내가 도저히 냄새 때문에 잠이 안와서 락스를 한 통을 다 뿌렸어. 그것도 사려면 돈인데. 그거 때매 화가 나서 동사무소를 찾아온 거야. 그런데 저기 저 생활지원팀장이 그러대. 벽화를 그려야 오줌들을 덜 싼다고. 공짜로 미술배우고. 어차피 작가 선생들이 다 그려준다니까 그냥 앉아 있는 거지 뭐. 그리고 말 안 해도 내 다 알아. 힘들게 구에서 지원금을 받아왔는데 참여자 없으면 위에서 보기가 참 그렇잖아요? 그러면 다음번에 돈이 또 나오나. 결국 써야 돼. 어차피 쓸 돈이고 우리 세금인데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건 난 좋다고 생각해요.


가까스로 심 선생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선매동여사님의 할 말을 개운하게 끝낸 뒤였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이분은 동네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 다른 분들도 다 그 마음으로 오셨어요? 직접 그리셔야 하는데?


- 심심해서 왔습니다아.


- 잘 하셨습니다. 그 옆에 분은?


- 나는 더 심심해서 따라왔어요. 깔깔깔


- 작가선생들이 잘생겼다 길래 확인하러 왔지. 호호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동네랑 친해지기도 할 겸 해서 왔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미술은 곧잘 했구요. 집안 형편 때문에 가지는 못했어요. 집 근처에서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한다니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생활지원팀장은 자신의 역량을 확인한 게 뿌듯해서인지 연신 박수만 치고 있었다.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심 선생이 일정표와 숙제를 나누어주었다. 


- 화양연화, “인생에서 아름다웠을 때”를 그려오세요. 잘 그릴 필요도, 굳이 색을 칠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나간 것도 다가올 것도 상관없습니다.


글이 주렁주렁 적힌 A4용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데,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냥 아무거나 그려오라면 되지, 무슨 같잖은 아름다움씩이나... 얼굴로 궁시렁 거리는 중 직원이 우리를 불러냈다. 뭘 또 말하려는지 짜증부터 난다.


- 심선생님 말씀으로는 두 분이 코디네이터라고 하던데, 정리는 저희가 할 테니 이 지도 보시고 체크 된 곳 중심으로 다녀오시겠어요? 벽 상태 보고 괜찮다 싶으면 주인에게 잘 설명해주세요. 저희가 미리 해두고 싶었는데 뭘 알아야 말이죠. 전문가들이시니까 뭐 있잖아요. 전문용어 써가면서 설득 좀 해보세요.


아니 이런 일을 기획했으면 벽 정도는 미리 잡아놨어야지. 없으면 없는 벽이라도 세우겠다는 마인드가 있어야지. 망할 공무원들 꼴랑 몇 푼 안 되는 지원금을 그나마도 날로 잡술라는 심보가 고약하구나.


1시간 만에 사람이 멍해져서는 허부적거리는 심선생이 우리를 보자 갔다오라며 검지손가락만 까딱거렸다. 


- 저놈의 손가락 까딱은 정말. 일 끝나면 저 손가락부터 분질러 버릴거야.


중얼거리는 나를 두고 원이는 재빨리 팀장에게 여분의 지도출력물을 얻는다고 나가버렸다. 일을 사서 하는 저런 사람이야 말로, 공공예술가의 표본이지.


'갤러리 친절한: 안친절(연재 종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인의 취향 6편  (0) 2019.03.06
타인의 취향 5편  (0) 2019.01.31
타인의 취향 4편  (0) 2018.12.27
타인의 취향 3편  (0) 2018.11.28
타인의 취향 2편  (1) 2018.10.26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