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6편

시끌벅적한 설명회가 끝난 뒤 일주일. 벽화봉사단은 지지부진한 회의와 소모적인 다툼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봉사단 인원의 상당수가 설명회 전, 심선생의 공공미술 수업과정에서 나가버린 터라, 남은 인원은 많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인원만이 남았다며 이제부터 진짜라던 심 선생은 회의마다 얼굴이 상하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남은 인원의 반 이상이 나가버렸고, 생활지원팀장도 흥미를 잃은 듯 우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어딘가로 급하게 통화를 하며 지나갔다.

뭐 외부에서 보기에 나름 알찬 일주일이다. 지역 답사도 했고, 지역토박이 인터뷰도 했고,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몇 가지의 키워드도 잡아냈고, 나름 진행된 건 사실이다.

“아니 몇 번이고 말하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어르신들이 무슨 취향이 있어요? 뭘 지역이 어쩌고. 그리고 저번에 만난 사람. 토박이는 무슨. 선매동에 집만 있지 멀리 거기가 사업장이라잖아요. 그리고 내가 제안을 안했어요? 했는데 왜 자꾸 그걸 무시해요? 화사한 걸 말하잖아요. 화사한 거!”

박여사는 오늘도 화가 났다.

“박여사님. 화사하다는 게 뭔지 그걸 설명하셔야지요. 매번 화사하다고만 하시는데,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로 말해보시면 좋겠어요.”

슬슬 심종상 선생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박여사 언니가 말하는 건, 길가에 핀 들꽃 같은 게 아닐까요? 형님? 들꽃 맞지? 저번에 나랑 답사할 때 들꽃 이야기 했잖아?”

심 선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한숨을 내뱉지는 않지만, 조만간 입 밖으로 나올까 불안하다.

“덕기 엄마! 내가 언제 들꽃이랬어! 그건 그냥 한 소리고, 화사하다는 걸 뛰어 넘는 예술적인 걸 말해야지. 예술이라! 우리 손주 어린 게 눈썹부터 미간까지 아주 예술이지. 그 보송한 얼굴에 솜털이 바글바글한 데다가 쭉 뻗는 눈썹을 보면서 내가 맨날 놀라.”

“여사님. 그럼 벽에다 박여사님 손자 얼굴 그린다는 거예요? 왜요? 손자가 선매동의 상징이라도 돼요?”

37개월 아이를 둔 수미씨가 튀어 올랐다. 조용하던 수미씨가 등판을 한 뒤, 상황은 한층 격해졌다. 언젠가 수미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나갈 때마다 저렇게 피하지 말고 판을 엎어야지! 했는데, 요즘 들어 아주머니들과 날선 대립 중이다.

“귀한 손자 얼굴 나도 벽에 넣기 싫네요! 젊은 엄마가 그렇게 까칠하면 못써. 아이 생각해서 수더분하게 살아야지. 요즘 엄마들은 참. 암튼 예술이란 게 생활 속에, 일상 속에 있다면서요.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어제 깜빡하고 잡곡. 왜 이마트에 파는 12곡 혼합잡곡 있지? 그걸 팔아 와야 하는데, 여기에 정신이 팔려 도통 살림을 못하고 있네.”

“그거 이마트 말고 홈플러스 가면 1+1할인하고 있더라. 그게 제일 맛이 나. 국산이고.”

덕기 아줌마의 말에 수미 씨가 긴 한숨을 쉰다.

“저 이런 소리나 주고받자고 애 유치원에 보내고 오는 거 아니에요. 대체 여기서 잡곡이 왜 나와요.”

박여사가 덕기 아줌마를 쿡 찌르며 어린 게 싸가지가 없다고 중얼댔다.

남은 4명은 모두 집에 갈 테고 나도 이제 여기서 그만 일을 해야 하는구나. 선매동 안녕.

“말은 이어서 할게요. 그 혼합잡곡이 없어서 흰밥을 했다고! 오랜만에 하얀 쌀밥을 보는데 뽀얀 것이 어찌나 이쁜지. 한참을 바라봤네. 식구들이 나보러 밥 안준다고 난리치는데, 저것들이 관찰이 창작의 근원인 걸 몰라. 더럽고 치사해서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김이 서려서 도대체 찍어지지가 않네. 암튼 그것처럼 어머니의 밥상. 그런 거 어때요? 그 할배들한테 물어봐요. 엄마가 차려준 밥 중에 어떤 게 가장 기억이 나더냐고.”

덕기 아줌마가 박수를 치며 박 여사의 감각을 추켜올려주었다. 그래 한국인의 밥상. 그걸 콘셉트로 해서 그리면 되겠다. 나는 그럼 개다리소반을 좀 검색하면 되려나.

“밥! 밥! 밥! 그놈의 밥! 지겹지도 않으세요? 평생 밥 지옥에서 살다 죽는 게?”

아! 수미 씨. 오늘만 참아줘요. 이번 주 그림 그리고, 이 프로젝트 마무리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 공공미술 정말 근처에도 발 안 담글게요. 부탁입니다. 제발. 나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건 대학원생의 볼펜 소리뿐이다. 저 대학원생은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스쳐 지나서 본 그의 논문 제목이 기억난다. 도시재생 코디네이터가 겪는 시민 정책의 양면성인가 뭐 그랬던 것 같다.

“어머! 어머! 애기 엄마! 밥 지옥이 뭐야! 내 새끼 내 남편 밥 해 먹이는 게 무슨 유세라고. 전업이 그걸 지옥이라고 해? 이 엄마 진짜 지옥 갈 소리 하네. 아니 밥지옥이 뭐야! 요즘 젊은 엄마들 말 참 이상하게 해. 이제껏 실컷 친정엄마가 해주는 밥 얻어먹고 살면서 언제부터 밥을 했다고!”

갑자기 대학원생이 의자를 길게 시끄럽게 끌며 일어섰다. 아마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것 같았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심선생도 같이 일어서고. 비흡연자인 원이도 그들을 따라 나섰다. 셋이 맨날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굳이 담배도 안 피우는데 따라 나서는 원이가 이해 불가다. 그래야 대화의 흐름에 낀다나 뭐라나.

물론 일주일 내내 이런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술술 풀리던 날도 있었다. 자율형사립고인가 암튼 유명 자사고를 준비한다던 중학생들이 온 적이 있었다. 자원봉사와 리더쉽 어쩌구였는데 노련하게 발제를 해오고, 토론을 준비 해 와서 기억에 남는다. 가끔 원이가 동영상과 사진을 그 부모들에게 보내는 번잡스러움이 있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원이를 보며 오지랖도 넓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 학부모가 원이에게 포트폴리오 알바를 제안한 것이었다. 원이는 사흘인가 일하고 목돈을 쥐었다. 택시비 30만원과 블로그 개설 및 업로드 200만원. 3일 만에 번 돈치고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원이 말로는 나중에 엄마 둘이 크게 싸움이 났다고 했다. 알고 보니 돈은 둘 중 한 엄마에게서만 나왔고, 당연히 블로그에도 그 아이의 얼굴만 나온 채, 다른 아이는 배경이 되었다. 원이는 상대편 아이 엄마에게 대체 얼마를 받았냐며 교양 있게 따져 묻는 전화 수십 통을 받았다. 원이를 선생님이라 부르던 아이들이 결국 선매동 지역아동센터와 외국인 관광안내소로 각각 나가버렸고, 우리에겐 지금의 혼란이 찾아 왔다.

밖에 나갔다 돌아온 심 선생이 벽에 하나씩 써내려갔다.

“회원님들 말씀처럼 지역에 대한 정보는 이정도면 되었어요. 이제 이걸 어떻게 시각화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했던 일주일의 시간 중 나왔던 주요 키워드를 말씀드릴게요.”

다시 시작되는 회의.

그놈의 마을타령 좀 그만하자는 박여사와 꽃이랑 밥상이 언제 합의 된 소재냐며 따지는 수미씨. 비겁하게 앉아 이 상황을 매번 녹음해 가는 대학원생. 머릿속 홈플러스 잡곡 생각으로 바쁜 덕기 아줌마를 뒤로 하고, 나와 원이는 화방으로 간다.

화방에서 뭘 사야 하나. 그릴 주제도 정해지지 않았고, 그림도 뭐도 아무것도 없다.

“그냥 뭐 다 사야지. 남으면 네가 가져가게 아예 아크릴로 살까?”

원이가 찡긋 웃으며 쿡 찌른다. 이럴 때 원이를 보면 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이 아니다.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면 어떻게? 바니쉬 처리를 어떻게 하려구?”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냥 잔뜩 아크릴 물감을 쓸어담아 사왔으면 좋겠다. 남은 거 내가 잔뜩 가져가면 좋으련만. 이번 프로젝트는 어차피 꽝이고.

최고의 승자는 얼결에 자사고 알바를 한 원이! 그리고 물감을 다 가져가는 조건으로 따지면 나도?

뭐 우리 동네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혹시 모르니까 흰색도 좀 많이 사고. 붓도 좀 좋은 거 사야겠다. 남으면 뭐 한두 자루 쯤 챙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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