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왜 낳은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청소년 시절, 목젖 끝까지 이런 말이 차오른 적이 종종 있다. 삼키고 또 삼켰다. 그게 내 부모든 신이든, 대답은 침묵으로 돌아올 게 뻔했으므로. 그때 세상은 온통 숙제로만 가득했다. 고통과 환멸과 지루함으로 이뤄진 숙제. 숙제를 내주는 사람의 기쁨만을 위해 숙제가 존재하는 세계. 거기에 종종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란 말이 기쁨을 더 찬란한 기쁨으로 만드는 액세서리가 되기도 하는 세계. 초등학교 때 만났던 단 한 명의 선생님을 존경했다. 아이들을 조건 없이 골고루 살피고 보듬고 있다고 느낀 유일한 분이었다. 나머지는 이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가 다 보였다. 그들이 더 많이 호명하고 더 많이 웃어주는 학생의 경우, 예외가 없었다. 그들 어머니의 얼굴을 번번이 ..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이는 천루이추라는 대만의 작가다. 그런데 글쓴이가 특이하다. 글쓴이 이름의 자리에는 개인이 아닌 ‘대만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는 단체명이 표기돼 있다. 이것만 봐도 책의 내용이나 주제에 대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니. 책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어쩔 수 없었던 누군가는, 이 책을 가만 집어 들었다가 재빨리 본래의 자리로 내려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집어 들던 순간보다 더 조용하게.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요즘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앞 문장에서 ‘요즘’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넣었다 뺐다 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야 산업재해피해의 현장과 그 현장에 잇대어진 죽음들과 삶들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하드커버로 된 표지를 열자 노란색 간지가 드러난다. 큰딸 이름이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다. 거기엔 글자들의 세계에 처음 편입되어 이제 막 제 손으로 그것을 쓸 수 있게 된 아이 마음의 환희가 담겨 있다. 서지정보가 새겨진 페이지를 보니,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99년이고 2007년 36쇄 발행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큰딸이 6~7세 되던 해에 구입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책장을 아이와 함께 넘기곤 했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다만 눈이 트일 정도로 환한 톤으로 그려진, 또 아이가 간지에다 써넣은 글씨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림체에 끌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은 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책을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고양이는 신기한 존재다. 온갖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힘겨운 마음 때문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고양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적어도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함부로 행복과 평화를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고, 눈앞에 저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물을 겨를조차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물론 함께 살게 될 경우 성가신 일이 많긴 하다. 고양이와 사는 건지 털 뭉치와 사는 건지 모를 만큼, 사방에 날려가 달라붙은 온 털들을 처리하는 것이 매일의 숙제로 건네진다. 고양이 대변 냄새는 또 너무 강렬한 나머지 매일같이 새롭다. 하지만 이런 매일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양이가 내 가까이에 실재하..
마흔 되면 죽어야지, 그 추레한 나이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 마흔 되기 전에 뭐든 이루지 않으면 일단 실패 아닌가. 마흔 넘은 뒤에는 그저 견디는 삶만 남잖아, 다 져버린 삶. 20대 초반,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게 생각난다. 이런 대화는 힘이 세서 혼자 남겨진 뒤에도 귓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었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이 말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그 생생함과는 다르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20대 후반에 결혼하여 10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 와중에 딸아이도 둘 낳고 키웠다. 이혼도 했다.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며, 글을 쓰고 만지는 일, 글 쓰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 기획자와 활동가의 정체성 또한 키워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그림책의 화자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 어린이다. 위 문장은 이 어린이가 아빠를 떠올리면서 자문하는 말이다. 어린이는, 개가 있고 나비가 있고 하늘이 있는데 어째서 살고 싶지 않을 수가 있는지 묻고, 아빠에 대해서도 또 한 번 묻는다. “어떻게 아빠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내가 있는데.”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말하던 사람이 별안간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든 이렇게 묻게 되지 않을까. 나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마음이 변한 건가. 혹시 내 존재를 지우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이의 아빠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어떤 마음의 병은 교통사고처럼 예고도, 이유도 없이 들이닥친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의도를 넘어선다. ..
둘째아이 출산을 몇 주 앞두고, 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 전 직장의 근무 햇수까지 포함하면 10년여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정사실에 더 가까웠다. 전문직 종사자도 아닌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다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다니던 직장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적잖이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후련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했고, 걱정스러웠다. 전업주부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 아이의 성실한 엄마 노릇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지. 무엇보다 사회적인 쓸모를 다한 것만 같은 내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자신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만 있고 아이 둘만 바라보면서도,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