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5편

노인회장의 인사가 마무리 되자 선매동 벽화마을만들기 팀원들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한낮을 향해가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연신 땀을 닦으랴 양산을 들랴 박수를 치랴 쉴 틈이 없었다,

- 박수 칠 때마다 양산이 한들한들하는 것이 아주 나비 떼가 따로 없구나! 장관일세!

그 말을 들은 박여사가 곧바로 “예술적 감각이 끝내주시네” 하며 추켜올려준 덕에 사방에서 살뜰한 대화들이 오고갔다. 박여사도 덩달아 신이 났다. 조만간 춤판이 벌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다.

- 안녕하십니까. 선매동 벽화마을 지원사업 진행을 맡고 있는 문화예술기획자 심종상입니다. 여러분. 마을 벽화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과거 열악한 환경을 예술로 가리려는 환경미화적 목적에서 진행되었다면, 현재는 지역민의 생활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지역밀착적 예술행위로서... 공공 미술적 관점에서.... 공동체 기반의 예술 활동이.... 공동체 내부의 소통을 향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주문자의 의미를... 장소 특정적인... 풀뿌리 민주주의를 향한...

심선생의, 때를 맞추지 못하는 강의 덕에, 뒷자리는 이미 반 이상이 나가버렸다. 앞자리는 사뭇 진지하다. 노인회장은 앞줄에 앉아 한자체를 섞어 쓰며 필기에 한창이고, 생활지원팀장은 캠코더 촬영에 한창이다.

- 내가 겨우 분위기 좀 살려놨더니 또 저러네. 사람이 너무 진지해. 그냥 이쁘게 꾸며준다고 하면 되는 거지. 또 수업을 한나절 하게 생겼어.

박여사의 한숨 섞인 말에 수더분한 덕기 아줌마가 조심스레 웃었다.

- 형님. 내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나 수업할 때 정말 힘들었다우. 그림 배우러 왔다가 미술박사 되는 줄 알았어. 그 글씨도 작은 걸 내가 끙끙대고 읽고 있는 걸 보고는 우리 집 양반이 늘그막에 집안에 미술교수가 나오겠다고 얼마나 놀려 먹었나 몰러.

사실 심선생의 강의는 학교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간,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면 노트 도 제출하도록 했다. 레포트가 아무리 좋아도, 시험성적이 우수해도 필기가 없으면 좋은 점수가 나지 않았다. 원이가 심선생의 사무실로 데리고 간 날이 기억난다. 그는 단번에 노트 두 권을 낸 학생이 아니냐며 반가워했다.

- 그래 맞아! MoMa 노트. 워홀 캐리커쳐가 그려진 그 노트! 반가와! 애제자네. 애제자! 그때 점수 잘 나왔을 거야. 그런데 이름이 뭐지? 학교가 어디였더라.

심선생의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설명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동안, 뒤편에서는 다과상이 차려졌다. 어서 한자리 앉아 시원한 수박이나 베어 물었으면 좋겠다.

- 저 근데. 어떤 그림을 원하실라는지 그걸 여쭤봐야지 않아요? 사람들이 똑똑만 하지 영 일머리가 없네. 아! 전 선매동 사는 박영자라고 하고요. 저 아실 거예요. 제가 선매동 불법쓰레기 야간단속을 촉구했던! 바로 그 시민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선매동이 무단투기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남의 일이라 생각지 마시고 민원을 적극적으로 넣으셔야 합니다. CCTV 설치 확보! 미설치 지역은 집중 단속! 요 두 개를 기억하시고요.

- 박선생님 아주 큰 일꾼이네. 국회의원 나와야 쓰겠는걸! 박영자를 국회로!

자포자기한 맘으로 원이가 쥐어준 수박하나를 묵묵히 씹고 있자니 눈에 보이는 것만도 할 일이 태산이다. 원이는 수박 한 쪽 야무지게 먹고는 휴대폰을 들고 할아버지들에게 다가갔다. 인터뷰를 하려는 모양이다. 분명 저 방대한 녹취를 나눠서 하자고 할 텐데, 원이 성격상 인터뷰를 중간에 자르지도 않을게 분명하다.

- 어린 시절 그 너른 벌판에 한들한들 움직이던 코스모스. 왜 지붕에는 박꽃이 피어서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게 바로 한국의 미여! 한국의 미! 요상한 그림이나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그림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지! 오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왜 벽에다가 액자로 쭉 걸어서 말이요. 그림 감상회를 열면 내가 말이지 거기서 시를 하나 읊어야지. 아!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스한 박꽃. 다정스레 어루만지며 어머님을 부릅니다.

- 우리 선매동의 역사가 이곳에 그림으로 남겨지길 바라요. 내가 도서관에서 찾아봤는데 우리 선매동은 고려 말서부터 기록에 있었단 말이지요. 신기한 것이 고려의 유적이나 기록이라고 하면 대개가 이북에 있다 이거요. 그런데 우리 선매동은 다르지. 고려 말에서 현재까지 그림으로 쭉 그려진다면 가치가 있지. 특히 선매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 전쟁고아로 나고 자라, 미군이 주는 분유를 끓여먹으면서 살아온 그 세월! 가루우유를 죽처럼 끓여주면 그걸 먹고 배가 차지. 어찌나 추웠는지. 그땐 왜 이리 추웠는지 몰라. 이 정부는 그 빨갱이들한테 쌀 퍼줘 돈 퍼줘 그냥 다 퍼주라고 그래! 뭐? 가짜뉴스라고? 이 양반이 가짜는 무슨. 내가 증거요! 내가!

- 저 양반 말은 반이 허풍이요. 당신이 무슨 전쟁고아야! 1년에 8번 제사 지내는 고아도 있어? 시제로 제사가 넘어가서 그렇지. 안사람이 조상님 제사 지내느라 세월 다 보낸 사람이요. 그냥 전쟁고아처럼 다들 어려웠다 그 말을 하고 싶다 이거지? 저 인간 말만 하면 지가 가장 고생했다고 하지.

- 작년에 내가 우리 아들네가 보내줘서 요코하마를 갔었단 말이요. 요코하마가 아주 갈만 합디다. 블루 라이또 요꼬하마라고 왜 들어봤을텐데. 마찌노앙까리가 돗데모 끼레이네 요코하마아, 블루 라이또 요꼬하마~ 그런 노래가 있소. 항구에 서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어떤가 저 불빛같이 흔들리는 인생... 그걸 그리고 싶은데 말이지.

-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곳이 어딘지 아시오? 아니 화가라면서 그걸 왜 몰라? 미대를 나왔으면 그 정도는 기본이지. 거기가 에르미타주 미술관이요. 쏘련. 러시아에 있는데 그 미술관 작품을 모두 감상하면 8년이 걸리요. 나? 난 안 가봤지. 내가 거길 어떻게 가나. 유튜브에 보니께 그런 데가 있다 이거지.

인생에서 이렇게 어려운 녹취는 처음이었다. 보고서에 모두 실리지는 않겠지만, 지역민과의 라포 형성을 위한 우리의 노력의 증거는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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