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4편

- 세상에! 우리 선생님들! 어쩜 이리 좋은 벽을 찾아내셨을까? 내가 한 번씩 왔는데도 전혀 몰랐네. 역시 보는 눈이 달라.


생활지원 팀장이 호들갑을 떨며 노인정에 들어왔다. 거친 듯 무심하게 쓰인 현판은 나름 고졸한 맛이 느껴졌는데,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공간에 대한 기대감도 높여주었다. 품성이 소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나름의 규칙을 지닌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는 곳. 상상 속 노인정은 세련되지 않지만 여유롭고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품위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심지어 마당에는 수도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여름에는 찬물에 수박을 시원하게 넣어두고, 겨울에는 김장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 그려졌다. 이상적인 커뮤니티란 이런 곳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계십니까?


조심스레 심 선생이 우리의 존재를 알렸으나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생활지원 팀장이 그런 심 선생을 뒤로 하고는 익숙하게 방문처럼 생긴 현관을 쭉 밀었다. 


- 에구 우리 아버지들 다 여기 계셨네. 오잉? 이기이기. 판 벌이셨네. 시퍼런 거 막 오가는 거 아녀요? 다리 들어봐요. 내가 확 신고해 뿔라!


- 아따! 꼴랑 10원짜리 들고 치는데. 뭔 소리랴. 흰소리 말고 저 짝으로 가버려.


열린 문 안의 광경은 상상과 사뭇 달랐다. TV를 보며 누워있는 몇몇과 화투에 열중한 세 명의 노인까지 댓 명이 고작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촐싹이는 목소리의 코미디언이 신명나게 트로트를 부르고 있었다. 화장실에 문제가 있는지, 열릴 때마다 지린내가 나는 바람에 고개를 돌려 숨을 참았다.


- 나랏돈이라고 너무 시원하게 지내시네. 잠깐 끄고 문 좀 엽시다. 이렇게 춥게 계시면 냉방병 걸려.


팀장이 냄새나는 방의 창들을 시원하게 열어 젖혔다. 


- 노인네들 오덜덜 떨까하는 생각은 하덜덜 말아.


TV를 보던 노인이 돌아누워 한 소리 하자 생활지원 팀장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 역시 우리 회장님 유모어는 따라 갈 수가 없어! 회장님! 힙합 알아요? 힙합? 힙합하는 젊은 애들 빰따구 날릴 솜씨구만요!


노인 회장은 슬그머니 일어나 커피를 대접한다며 선반을 뒤적거렸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커피포트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커피, 설탕, 프리마가 등장했다. 갑자기 원이가 본인이 타겠노라며 큰 소리로 드실 분들 손! 하고 외쳤다. 젊은 아가씨가 주는 커피가 얼마만이냐며 소싯적 다방좀 다녔다는 할배들이 서로 마신다고 난리통이다. 원이가 저러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매번 신기할 따름이다. 심 선생은 미술계에는 없는 센스와 눈치를 갖춘 공공미술계의 재목이라며 농담처럼 추켜올려주었지만, 항상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기에 불안하기도 하다. 언젠가 원이에게 이런 지분거림에 대한 불만은 없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신경 쓰는 내가 더 이상하다고 했다. 오늘도 원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있다. 일을 쉬이 한다는 이유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나가는데 일조하는 원이가 원망스러웠다. 


- 뭐해요? 친구라면서 좀 도와요.


생활지원 팀장은 벌써 한잔 얻어 마시고는 나보러 준비를 도우라고 채근했다. 재빨리 가방에서 줄자를 꺼내 보이며, 실측을 해야 한다고 나와 버렸다.


- 언제는 선생님, 선생님 추켜세우더니 웃겨 정말.

궁시렁거리며 고작 3m 줄자를 들고 이리 저리 재고 있자니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방안에서는 뭐가 좋은지 호탕한 웃음이 문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다. 


- 누구요? 누군데 이 벽을 재고 있어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줄자를 고정시킬 돌을 찾느라 밖을 어슬렁거리는데, 지나던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노인정에 들어오시는가 묻자 대답 대신 체머리만 흔든다.


- 우린 이제 거기 안가요. 보름 전인가 대판 싸우고 나왔거든. 아니 다 늙어서 남의 남자들 헛짓거리 하는 꼴을 봐야 하나 싶어서 우린 다 나왔어. 근데 웃긴 게 그나마 있던 할배들 반 이상 줄었다네. 고거 쌤통이다. 지금 남은 양반들은 그래도 점잖은 사람들이라. 이전에는 말도 못했어. 어휴 지겨라. 지겨.


고작 몇 분이 에어컨 펑펑 틀며 시원하게 지내시는데, 여름만이라도 참아보시죠 하니 찜통이라도 속편한 내 집이 낫다는 말만 돌아왔다. 생각보다 갈등의 골이 깊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마자 심 선생 입에서는 올커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내부의 벽이라 작업의 명분이 부족했는데 사용자간 갈등해소의 목적이 생겼다며, 이들의 분란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이틀 후 다시 백화노인정을 찾았을 때는 한눈에 봐도 열댓 명은 넘겠다 싶은 노인들이 방안 가득 점잖게 앉아계셨다. 마당과 화장실에 계신 분들까지 합치면 아마 스무 명 가까이 될지도 모르겠다. 벽화팀원들의 형형색색의 양산들이 백화노인정 입구를 가득 채웠다. 노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특히 노인 회장은 그 땡볕에 콤비 양복까지 갖춰 입고는 진지하게 벽을 등지고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 에~ 우리 백화노인정은 사람냄새 나는 인정 높은 쉼터로서, 에~ 개소한지는 10년이 넘었지만서도 작년에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에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 그러니까 지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이 말씀이 외다. 에~ 여기 오신 분들이 다 벽화에 일가견이 있고 평단에서 인정받고 계신 분들인 만큼! 에~ 우리 벽에 예술적 기교가 넘치는. 에~ 아주 창의적인 예술세계를 펼쳐 주십사하고 바라는 바이올시다.


노인 회장은 화답하는 박수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양산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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