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7편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두 달이 넘는 시간을 꼬박 매달렸건만, 일정은 꼬이기 일쑤였고, 일정이 맞아떨어지면 관계가 꼬였다. 박여사와 수미씨와의 말다툼으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덕기 아줌마가 일찍 도착해 회의실 중앙에 보따리를 풀었다. 매번 음식 싸오는 사람은 덕기 아줌마 밖에 없었다. 덕기 아줌마의 혼합잡곡 때매 난리가 났다지만, 정작 아줌마의 수제 깨강정 맛은 일품이었다. 오도독 오도독. 회의실에는 고소한 깨강정 소리만 가득했다. 곧이어 박 여사가 들어와 “아이고. 솜씨도 좋아 맨날 이게 뭐람” 하며 깨강정을 한웅큼 집어들었다. 위층에서는 오전 에어로빅 수업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벽을 타고 우리에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좋을 때다. 관절 성할 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미친년 머리댕기마냥 들썩거린다. 그치?”

박 여사의 한마디에 덕기 아줌마는 또 까르르 난리가 났다.

“형님은 어쩜 그리 말을 재밌게 하오? 까르르르.”

아줌마들 사이에서 깨강정을 먹는 사이 원이가 들어와 종이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입을 얼른 털고 일어나 원이를 도왔다. 물론 깨강정도 입안에 넣어주었다. 원이는 맛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덕기 아줌마냐고 눈짓을 했다. 뭔가 웅엉거리는 소리로 묻기에, 아무래도 수미 씨는 안 오려는 모양이다 고 했다. 심 선생이 들어오자 덕기 아주머니는 접시에 몇 개 담아 자리에 놓아주었다.

“자! 이제 벽화모임 최종 단계가 다가왔습니다. 어찌 보면 결정된 것 하나 없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지요. 각자 생각들이 많으실 테지만. 이젠 더 이상 이런 회의도 할 수 없습니다. 정해지지 못한 그림 주제와 소재는 벽화의 또 다른 주역인 노인정 어르신에게 돌리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라. 벽화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지역민이자 지역민의 이해자로서 여러분이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란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커뮤니티 아트라면 당연히 생길 일이고, 있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원이가 사람들에게 이미지와 글이 담긴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방대한 인터뷰의 녹취 일부가 적혀있었다.



 헤어지는 그림자 

아이가 맨 첨에 그림자 보믄 무서워 도망친다고 하지? 이게 뭔가, 왜 떨어지지 않는가 하고 말이야. 주책맞게 나도 최근에 그림자 때매 울었다오. 애들한테 말하면 또 상 치른다 걱정할까 싶어 말은 안했지. 안사람이 한참을 앓았다가 봄이 막 시작할 때, 그때 돌아갔거든. 봄이 젊었을 때나 좋지 몸져누운 늙은이 남은 기력을 아지랑이 마냥 날려버릴 때야.

큰딸 집에 한 달 있다가 아들 집에 보름 있었으니 거의 두 달을 집을 비웠네. 내 집에 온지 이제 일주일이야. 애들이 그 사이에 지 엄마 짐 내놓고, 뭐 깨끗이 해두었더군. 애들 속이 속이겠나 싶었지만, 어차피 나는 못했을 일이야. 애들이 새 이불도 한 채 해놨어. 참 신기한 게 잠자리가 낯설어지니 생각도 덜 나는 것 같더군. 조만간 선매동 집은 내놓고, 딸 집 근처 작은 아파트로 들어갈라고. 아직 애들이 어려서 내가 틈틈이 봐줘야지.

그날도 초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 유튜브로 나훈아 노래를 틀고 흥얼거리며 말이야. 그런데 장롱 밑에 뭔 허연 게 있더라구. 벌레구나 싶어서 틈으로 손을 밀어 획 끄집어내는데, 집사람 알약이네. 그때 약이 너무 늘어서, 약 먹다 배가 부를 지경이었어. 병원에서 한 달 치를 받아오면 그걸 하루 먹는 약만큼 나눠둔단 말이야. 언젠가 뭘 잘못 뜯었는지 약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날이 있었어. 아픈 사람이 그날따라 화를 어찌나 내던지 그걸로 말다툼을 한참을 했네.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응. 그 약이야. 그날 바닥에 떨어진 약 중 하나.

그 약을 꺼내서 손위에 올려놓고 이리 저리 봤지. 그걸 초저녁 어스름한 빛에 기대어 보는데, 아주 얇은.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가 그날따라 보이는 거야. 눈을 껌벅거리면서 그림자를 찬찬히 봤지. 만물에 그림자가 있는 건 당연하잖아. 그 당연한 걸 그날따라 한참을 봤어.

저 작은 미물에게도 그림자가 있는데, 세상에 그림자 하나를 못 남기고 가는 인생이 서글프더라구. 그래서 한참을 울었네.

그 알약? 뭐 그걸 어디에 둬? 냉큼 버렸지.

그림자? 응. 안 그래도 요즘 그림자를 그리고 있어. 왜 큰 달력 있지? 그 달력에 내가 하루에 하나씩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솜씨가 없어서 그림자만 그리고 있어. 밖에서 봤던 그림자 중에 기억나는 걸 그릴 때도 있고. 별거 없어. 그냥 선이 몇 개? 어제 손자가 와서 그걸 보고 “하부가 달력에 낙서한다” 하는 거야. 낙서처럼 보이겠지만, 뭐더라, 일기. 그림일기 같은 거야. 매일 그림자랑 헤어지는 일기. 한 달 치를 한눈에 볼 수 있지.

뭐했냐고? 젊어서? 뭘 하긴 그냥 장사했지. 그림? 무슨. 우리 때 남자가 환쟁이 된다하면 누가 반겨주나. 내가 벽지장사를 오래 하긴 했네. 지금 있는 오색인테리어 가게가 원래 내가 했던 벽지사였다고, 

(201*년, 5월 28일, 70대, 남성, 선매2동)

“어머! 오색인터리어 사장님이네? 어머. 안 그래도 사모님 안보이시는지 꽤 됐는데 아프셨구나. 어쩌믄 좋아.”

덕기 아줌마는 글을 읽다가 어머! 어머!를 연신 외쳤다. 이미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그 사모님이 보통 고생이 아녔어요. 아저씨가 벽지장사를 오래 하긴 했지만, 정작 동네 일 받아서 도배하러 다닌 사람은 그 집 아줌마에요. 아저씨는 그냥 옆에서 풀이나 치지. 기술자는 아줌마라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 기술이 좋아서도 인기였지만,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언제든 공사를 해주니. 이 동네 벽지 공사는 거 진 그 아줌마 솜씨요. 이를 어째! 어째! 돌아가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 집 사장님은 한량이요. 그냥. 아줌마가 살림하랴 일하랴 바빠도 할아버지 서예한다 기원 간다 하면, 풀 다린 거 마냥 옷을 빳빳하게 해서 입성 좋게 만들어 내보냈다우. 그래도 그 고생이 헛된 건 아니네. 사모님 알약만 봐도 눈물을 쏟아내니 말이야.”

박 여사가 덕기 아줌마 말에 냉큼 쏘아 붙였다.

“오색 벽지사 아줌마 고생한 거 이 동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긴데 뭔 이제사들 눈물바람이야. 그럼 같이 기술을 배웠어야지. 풀칠도 뭘 해요. 나중엔 아줌마가 사람 써서 데리고 다니며 했지. 저렇게 돈만 벌다 죽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막말로 새장가를 들어도 어쩔 거냐 이말이요.”

심 선생님이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에 나눠드린 글을 다 읽으신 것 같습니다. 이번 그림 주제가 바로 그림자에요. 벽지사 할아버지 말씀대로 우리는 하루하루 헤어지는 중이에요. 그걸 그림자로 표현하신 할아버지는 이미 작가의 눈과 마음을 가지신 겁니다. 전 듣다가 무릎을 탁 하고 친 게. 바로 어르신이 매일 일기처럼 달력에 드로잉을 한다는 거였습니다. 헤어지는 그림자에 대해 일기 쓰는 것. 이미 작가 생활을 하고 계신 거죠.”

심 선생은 그림 그리는 전날까지 <그림자 찍어오기> 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 그림자는 내 주변의 사물들의 것이라고 했다. 내가 헤어져야 하는 것들에 대한.

벽에는 아마 그림자가 그려질 것이고, 그림자마다 설명이 붙을 예정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벽 위에 몇 개의 그림자를 얹혀 보았다. 간략하게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생각보다 모던하고 감각적인 연출이 될 것 같았다. 원이는 심 선생과 모인 팀원들을 내 모니터 앞으로 불러들였다.

“어머! 어머! 멋있다. 흰 벽에 조약돌마냥 콩콩 박힌 게 콩떡같이 예쁘네.”

덕기 아줌마 말에 다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두툼한 콩떡 같기도 한 게 소담하니 예뻤다. 간만에 맘 편하게 문을 열었다. 다들 마지막이라 그런지 아쉬운 맘에 책상 정리만 한참을 했다. 정리를 얼추 마치고는 바로 떠나지 못하고, 어느새 내 노트북 주변에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림자 색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색이 변하면 그림자가 아니지.”

“그래도 꼭 검정 일 필요는 없죠? 아까 덕기 아줌마 말처럼 콩떡 같기도 하다.”

성원에 힘입어 나는 회의가 끝난 한참 뒤에도, 남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색과 비율을 조정했다. 다수의 의견에 헷갈리긴 했지만,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엉뚱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았고, 타인과 지역공간에 대한 배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감을 던지고, 뿌리는 추상 표현주의식 작업 상상을 하거나, 온갖 조잡한 이미지의 나열로 키치의 왕국을 만들었었던 그동안의 스케치와는 달리, 제법 그럴싸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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