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주장』 서평 / by 희음


저주로부터 일탈하기: 난잡한 복종



안티고네의 고백


    “그래요, 고백합니다. 저는 제 행동을 부인하지 않겠어요.” 


    이것은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 앞에 섰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누구도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해선 안 된다고 했던 크레온 왕의 칙령을 어기고, 안티고네는 자신의 오빠인 그를 묻어주었다. 안티고네는 그렇게 치명적인 위반 행위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행위를 했음을 부인하는 것 또한 거부(위반)했다. 바로 그 두 번째 ‘위반’이 고백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문제적인 고백이 안티고네를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 그 고백의 언어에는 남성적 과도함이 스며 있으며, 크레온의 권위를 흡수한 흔적이 있다. 크레온으로부터 행위 주체성의 수사를 빌려와 말하고 있는 것. 즉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맞서는 동시에, 바로 그 맞섬의 대상이 되는 크레온의 목소리로써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말한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행위는 “서로 맞서는 것이기보다는 서로를 거울처럼 되비추고 있다”고. 헤겔의 말처럼 크레온이 국가를 대표하고 안티고네가 친족을 대표한다고 할 때, 이 둘은 스스로를 재현하기 위해 상대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둘 모두 한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는 셈이기도 하다. 크레온 앞에서 고백하면서 안티고네는 남성처럼 되고, 안티고네의 말을 듣는 동안 크레온은 남성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젠더는 교란되고 국가와 친족은 뒤엉킨다. 안티고네는 “이상적인 형태의 친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의 일그러짐과 자리바꿈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헤겔은 안티고네가 친족이라는 이름을 대표한다고 말하면서도 안티고네를 교묘히 이중화한다. 안티고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자기의식은 국가(남성)의 영역이며, ‘국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모성(여성)의 영역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서로에게 맞물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안티고네가 친족 한쪽만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헤겔은 또 안티고네가 주장하는 법이 고대 신들의 불문법이며 활발한 흔적의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법이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공적인 법인 성문법과는 반대되는, 법의 무의식이다. 법의 무의식은 ‘글쓰기 이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분명 그 공적인 법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지 않은가. 크레온의 언어로써 말이다. 


    버틀러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헤겔이 끝내 다루지 않고 함구해버리고 말았던 안티고네의 ‘언어’ 속에서, 헤겔이 풀어놓은 문장들의 숨겨진 틈새에서 그 가능성은 발견된다. 안티고네가 서 있는 경계가 “의식적이고 공적인 분야에서 귀신처럼 떠도는 어떤 대안적 합법성, 바로 그것의 흔적”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버틀러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할 수도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되었던 ‘어떤 것’,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도 않았던 ‘무엇’이, 인식 가능한 존재로 출현하게 만드는 하나의 열림, 출구, 가능성 말이다. 


안티고네의 죽음


    한편, 라캉은 안티고네의 죽음에 집중한다. 그는 죽음 충동과 관련하여, 모든 법의 성문화에 앞서 있는 불문법이야말로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저 너머의 상징적 경계를 표시한다고 말한다. 안티고네는 그 경계선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안티고네는 법 너머의 법을 이야기하면서 죽음 쪽으로 몸을 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캉에게 안티고네는 사드적 고통/고통의 극한 이미지를 지닌, 매혹적이고 미학적인 존재가 된다. 회생이 없는 “두 번째 죽음”, 즉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버틀러는 지적한다. 라캉이 자신이 예시한 형이상학적 진리와 안티고네가 살아낸 역사 드라마를 분리시킴으로써, 그 드라마로 인해 어떤 종류의 삶이 ‘말할 수 없는 삶’이 되는지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고. 라캉은 안티고네의 죽음 충동을 경유하여 매혹과 미학의 진리를 설파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안티고네가 꾸역꾸역 살아낸 삶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내는 동안에도 끝없이 그 존재가 부정되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이다.


    라캉은 안티고네의 욕망 내부에 있는, 죽음을 향한 운동이 안티고네를 상징계 바깥으로 가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죽음은 안티고네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에 의해 선고되었다. 죽음의 운동을 야기한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의 법(상징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순전히 안티고네의 욕망에 내재한 특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캉은 또 “아버지의 담론(상징계) 그것은 소위 초자아라 불리는 것이 된”다고도, “인간질서의 특징은 존재의 매 순간마다, 그리고 매 단계마다 상징 질서가 개입”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라캉은 친족이 상징계의 한 작용으로서 인식 가능성을 구성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라캉에게 안티고네는 친족의 경계로서의 존재이다. 그런데 라캉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상징계(친족)의 욕망을 언제나 이미 담지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다. 상징계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매 순간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안티고네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하나의 ‘경계'로 위치 지어졌는가 하는 물음을 떨치기 어렵다. 


안티고네의 복종 또는 일탈


    라캉은 상징계, 즉 친족을 ‘인식’ 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인간 세계의 보편 법칙으로 삼는다. 친족이 ‘언제나’ ‘이미’ 문화의 보편적 법칙 안에 기호화되어 있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친애 금기를 전제로 하는 친족이 인식 가능한 것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동성애적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친족 안에서는 위치 아닌 위치가 된다.[각주:1] 


    그러나 버틀러는 친족이란 하나의 상황이자 실천이며, 그러한 반복적 실천에 의해 시간에 맞게 재설정되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족은 존재의 형식이 아니라 행위의 형식인 것이다. 안티고네가 그것을 입증하는 인물에 다름 아님을 버틀러는 설파한다. 안티고네는 친족의 관점에서 오빠를 매장하지만 친족이라는 이름 자체를, 추문을 통해 재설정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친족은 안티고네의 수행적 반복, 반복적 수행에 의해 ‘다른 것’이 된다. 


    버틀러는 안티고네에게 있어 ‘저주의 말’이 어떻게 수행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이를 입증한다.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에게 내린 저주, “평생 죽은 사람(아버지) 말고는 어떤 남자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한참 뒤 안티고네에게 의해 난잡한 복종의 방식으로 실현된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오빠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면서 안티고네는 이 저주를 존중하는 동시에 불복한다. 안티고네는 죽은 남자(오빠)를 사랑할 뿐이므로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는 셈인 것이다. 


    저주의 시간성이란, 일어난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던 것이고, 언제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치명적이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등장한다. “저주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안티고네의 난잡한 복종의 사례가 보여주듯, 저주는 일탈된 형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말은 반복되고 말의 힘은 재실행되지만 그것이 언제나 근원과 동일한 방식은 아니며, 행위자 또한 자신이 언제 저주에 참여할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저주 그 자신 역시도 저주의 실행/수행의 때를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주로부터의 일탈 가능성에 대해 버틀러는 주의 깊게 역설한다. 여기에는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저주의 말에 난잡하게 복종한 사례뿐 아니라, 안티고네에 의해 호명되는 ‘오빠’라는 기표에 아버지, 에테오클레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친족 위치가 다 놓일 수 있게 되는 서사 또한 포함된다. 그리고 이 시작점에는 근친상간이 놓여있다. 안티고네를 둘러싼 모든 비극과 저주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근친상간이 이성애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안티고네는 이 드라마를 이성애적 드라마로 결말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가 되기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흔들리는 젠더로 공적 영역을 추문에 휩싸이게 함으로써, ‘신부의 침실’을 무덤으로 설정함으로써 안티고네는 이성애를 뒤흔드는 존재가 된다. 


우울증적 주체의 탄생


    안티고네의 죽음은 오이디푸스의 말에 의해서 선고된다. 그에게 가해진 처벌은 그가 죄를 짓기도 전에 내려져 있다. 안티고네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 그 이상한 장소에서 그가 말하고 있으며 죽었는데도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말은 무엇이며 안티고네는 또 누구인가. 이런 유령 같은 물음만 떠돌 때 생산되는 것이 우울증이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사회가 자신을 배제시킬 때, 생존 가능성의 외부와 사랑 영역의 외부에, 삶과 사랑을 수반해 오는 것이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문화적 층위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데, 그것은 반복되는 추문들을 통해 극복되기도 한다. 말할 수 없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던 바로 그 용어를 차용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만든다. 안티고네가 만들어낸 추문들, 크레온의 언어를 전유하여 말 되어진 안티고네의 고백이 보여주듯. 


    행동할 권한이 없는데도 행동하고, 자신이 배제되어 있는 호칭의 언어 안에서 말하며, 인간됨의 전제 조건이 되는 친족이라는 어휘를 뒤엎는 안티고네. 라캉의 말처럼 친족이라는 것이 진정 인간의 전제 조건이라면 “안티고네는 정치적 비유어 오용(catachresis)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영역의 인간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젠더가 뒤바뀌고 친족이 자신이 토대한 법 위에서 비틀거릴 때 태어나는 우울증적 주체. 이 우울증적 주체의 발화행위, 바로 그 치명성이야말로 인식 가능성의 일탈적 담론을, 미래로서의 담론을 열어젖히게 될 것이라는 주술(이미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말)을 되뇌며 버틀러는 글을 맺는다.

  1.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7장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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