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숫자는 영으로 수렴된다 / by 은수

모든 숫자는 영으로 수렴된다

- 소설가 천희란에게 부치는 편지


  있잖아 내가 요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8은 너무 오만해 9는 너무 완벽하고 그럼 3은? 3은 좀 다정한 것 같아 4는 깍쟁이고 2는 자기밖에 몰라 5는 완전 맹탕이고 6은 좀… 뒤가 구리지 1은 정말이지 내가 참 할 말이 많은데 너무 순수해서 피곤해 0은 어떤데? 0은, 0은 늘 차분하지 1부터 9까지 모두 0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렇게들 설치는 거야 0은 그들의 모자란 부분들을 모두 감안해주고 조용히 입을 다물지 0은 그런 사람이야 0은 검지를 인중에 가져가던 첫 손짓이고 시를 쓰고자 마음먹었던 그때 그 시간이자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노랗게 마른 들판을 홀로 서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야 세상은 어딘가 비빌 언덕이라도 있다는 듯이 막장으로 치닫고 그 시대를 잠그는 역할은 꼭 0에게 맡기는 거야 모든 책임은 그가 움켜쥔 주먹 속에 우겨 넣고 다들 벨트 풀고 냅다 달리는 거지 그런데 그거 아니? 그런 0은 그들의 죄를 모두 묵과해준다고 착각들 하지만 실은 0은 그들의 죄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맨눈으로 다 지켜보고 있다는 거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깡그리 잊고야 마는 윤회의 굴레를 돌리는 게 그들이 책임을 떠넘겼던 바로 그 0의 손이라는 거 0의 그런 고지식한 면이 누군가에겐 아주 구체적인 구원이 될 거란 거


  나는 그래서


  영의 기원을 믿어



시인 '은수'가 말합니다.


이 이름을 되찾기 위해 다시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책 앞에 쓰이기엔 너무 과분한 이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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