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에 핀 라플레시아 / by 영미
- 포에틱 페미: 오네긴 시창작 그룹
- 2018. 11. 1. 09:31
“그럼 앞으로 우리 섹스 못하는 거야?” 카페 안으로 울려퍼지는 너의 목소리가 나의 이곳저곳을 베어 먹는다 이틀 전, 자궁에 크고 붉은 라플레시아들이 마구잡이로 피었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사실을 너에게 막 말한 참이었다 베어 먹힌 나는 절반의 미소만 지을 줄 알고 너는 그런 내가 추해서 견딜 수 없다고 지껄인다 점점 커지는 너의 목소리에 금이 간 유리잔은 이내 터질 것만 같지만 사람들은 투명한 손으로 눈을 가릴 뿐이다 돌연 자궁에 핀 라플레시아들이 부들부들 경련하기 시작하고 나는 아랫배를 꽉 움켜쥔다 하지만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라플레시아들이 피워 올리는 분노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는 너는 상한 흙더미 속에서 썩어가는 수박 씨앗 같다 마침내 산산조각 난 유리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랑 섹스할 일은 영영 없을거야.” 그러자 경련이 뚝 멈추고 항문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방귀가 튀어나온다 놀란 너의 입과 콧구멍에서 쉰내 나는 거품이 방울방울 흐른다 너의 표정 위로 철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거대한 핏빛 꽃송이들 날짐승의 사나운 냄새를 풍기며 라플레시아들은 너의 표정을 인정사정없이 씹어 삼킨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표정을 바라보며 네가 비명을 질러대자 그 비명마저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린다 이윽고 꺼억 꺽, 만족스러운 트림을 내지른 라플레시아들이 실패한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사방으로 픽, 픽 터져나간다 너의 표정과 비명 그리고 라플레시아가 뒤섞인 고깃덩어리를 향해 가래 섞인 침을 뱉자 그제야 우리를 향해 쏠리는 시선들
시인 '영미'는
시를 씁니다. 맥주를 좋아합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리스 비앙의 소설 『세월의 거품』에서 여주인공의 폐에 수련이 핀 것을 변용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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