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고발(3)

    나는 때때로 관계에 대해 바라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연인들에 대해 대체로 많은 것을 수용하는 좋은 연인이었고 그것을 담보 삼아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연인에게 달라고 요구하며 관계를 맺거나, 파탄 내거나, 주도해갔다. 그런 요구에 목줄 메인 개처럼 끌려다니던 연인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지쳐버리곤 했다. 지친 그들이 가장 손쉽게 취하는 방법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를 포기하면 나는 ‘그래, 네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너는 그냥 개인데.’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관계의 일부분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런 취급을 받은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는 나의 놓음에 쫓겨 사라졌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의 연인이던 W에게 과거 있었던 일을 아주 어렵게 털어놓고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었다. 한 학년이 100명도 채 되지 않던, 그래서 한 학년 재학생 전부가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내던 작은 학교를 함께 나온 터였고 W는 A와 돈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여 년 가까이가 지나고 서로 다른 대학교를 가서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식을 알고 지내던 친구사이였다. 내가 그 일을 말할 사람으로 W를 골랐기 때문에 W는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가해자이고, 삶에서 얼마간 사라졌다가 갑작스레 다시 나타나 연인이 된 사람이 피해자이고, 그 둘이 서로 친구인 동시에, W의 친구이기도 한 골치 아픈 상황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며칠 고민하던 W는 본인이 이 일에 나서서 조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W는 한국 남자였다. 한순간도 한국 남자가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다. 그는 한국 남자 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절대로 들어가 볼 수 없는 ‘한국 남성 카르텔’ 안쪽의 사람이었다.

    나는 비 당사자인 관찰자로서, 한국의 남성들이 어떤 집단을 만들 때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서열과 룰을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그 룰이 어떤 부분에서는 그 집단에 속한 남성들을 관계에 속박된 피해자로 만든다는 것도, 가진 관계의 수가 적은 남성일수록 더 쉽게 그 관계에 자발적으로 속박될 수밖에 없음도 알고 있다.

    그들은 비슷한 향취를 가진 남성 동료들의 사회적 인정-주로 남성성과 의리에 대한-이 없으면 그 관계의 외부로 튕겨져 나갈 것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튕겨져 나가지 않기 위해 때때로 카르텔 내부의 남성 동료가 부도덕을 저지를 때 그것을 암묵하고 그것을 의리라고 지정한다. 집단이 기능할 때, 불편에 대한 암묵은 설득보다 편리하고 또 다른 불편을 야기하지 않는 온건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나설 수 없다’는 선언을 한국 남성 카르텔의 일원으로써 작동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인의 불가피한 암묵으로 인지했다. 이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입맛이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혼자 견디는 것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W를 용서하고 허용하는 나의 방법이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내가 취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허용의 방법론이고, 많은 경우에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안다. 남성들이 지어 놓은 카르텔이 유지되며 공고히 작동하는 동안 묵인되는 부도덕은 외부 피해자인 여성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소비하고, 여흥거리 삼는다. 피해자 생산의 산실. 이 비통하고 단단한 것은 사라져야만 옳다. 이를 유지하고 이에 속하려는 남성들의 대다수가 피해자일지언정 가해자이며, 부도덕함을 이 문장으로 고발한다.

    이후 그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W와의 연인 관계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어차피 한쪽만의 이해가 관계의 전부를 이끌어가는 관계는 연애일 수 없다. 그것은 ‘이해’라는 것이 이미 이해 당사자의 자각으로 인해 권력을 획득한, 그리고 그 권력이 한쪽으로 쏠려버린 관계다. 그것은 연애가 아니라 인간과 개의 관계다. W는 내가 그를 이해하는 순간 연인의 자리에 있기 힘들게 된 셈이다. 관계가 그런 식으로 변형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나에게 스스로 손가락을 들어서, 어제까지 나에게 곁과 힘을 내어주던 A를 오늘의 가해자로 지목하고 심문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관계를 홀로 끌어갈 힘이 없었고, 힘이 없다. 그렇기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A 또한 긴밀히 용서할 것이 자명했다.

    어느 날엔가 용서라는 개념이 완고해지길 기대하며 도서관에서 <용서하다>라는 책을 집었다가 완전한 용서의 교착에 빠졌다. 자크 데리다의 강연을 받아 적은 얇은 책이었다. <용서하다> 내부에서, 데리다는 ‘아포리아’라는 개념에 집착적으로 전념했다. 아포리아는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 혹은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모순, 역설, 교착의 개념이다. 또한 데리다는 기증과 용서의 모호한 특성을 비교하며 기증은 주고받는 교환 경제에 속하지만 이 경제 체제를 인식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기증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내가 무엇을 준다’는 개념에 대해 절대적으로 망각해야만 비로소 온전히 줄 수 있다는 말로 읽혔다.

    이러한 관점과 붙어있는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선언할 때 용서라는 행위를 스스로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완전하지 못한, 모순에 빠진 용서로 바꾼다. 이러한 용서는 내가 타인에게 주고 있는 순간의 유일성, 나의(용서 행위자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용서를 선언하는 동시에 용서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는 완전한 용서의 교착이다. 데리다는 용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것에 의하면 나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결코 충분히 주지 못하기에 무언가를 주는 것으로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 나는 내가 용서를 선언했을 때 상대방이 감사하길 원하고, 그것이 바로 절대적 주권의 행사다. 나의 용서는 완전하지 못한 권력적 형태의 것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권력을 행사하려 함에 나는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그럴 수 없어서, <용서하다>를 읽는 당시의 나는 자주 괴로워하고 자주 울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 것을 아는데도 자꾸만 잘못을 빌고, 매달릴 곳이 없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매달릴 곳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이 상태에 대한 말을 할 수 없어서, 결과적으로 나는 말짱해 보였다. 속이 부풀다 찢어져버릴 것 같은 통증을 느껴도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에게는 용서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 그 불가능하고 완전한 용서의 가능성조차 없다. 이러한 교착 안에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늘어놓고 편해지려는 시도를 했다. 이수역 근방에서 W나 A와 마찬가지로 고교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Y와, Y의 대학 동창인 S를 만난 날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얘기하고 용서의 의중에 대해 털어놓았다. Y가 그 둘을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마음 안에는 근본적으로 인간, 특히 친구, 그리고 관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함을 예전부터 보아 왔으면서도 그렇게 했다. 다시 한 번 배척당할 것이 두려움에도 조금 편안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매달리듯이 털어놓았다. Y와 S는 내 말을 빠짐없이 경청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비슷한 본인들의 경험을 나에게 공유해 주었다. 경험과 경험이 부딪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는 대체 불가능한 온기가 있어서, 나는 아주 간만에 관계가 주는 온기를 조금 취할 수 있었다. 안도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이 약간 빨갛게 된 Y가 내 왼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쥐고 “경진아, 그 별것 아닌 작은 애들이 진짜 너에게 하면 안 될 짓을 많이 했구나. 네가 이제 그 애들에게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돼. 네가 이걸 공론화해서 A를 아주 부숴버리고 싶으면 내가 그걸 도울게. 네가 A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 당장 어떤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것도 도울 거야.”라고 말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동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완전한 수용의 언어였다. 화자의 도덕성과 청자를 향한 애정이 단어 사이사이를 메꾸고 연결하여 만들어진 그 아름다운 말을 들으며, 나는 고마움을 느끼고 이리저리 헤집어졌던 마음이 차츰 원래의 형태에 가깝게 가라앉는 한 편으로 그 말이 연인의 자리에 놓았던 사람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임을 알았다.

    가장 애정을 쏟고 공을 들이는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주지 않았던 말을 몇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던 친구에게 들으니 연인이라는 것이 가지는 관계성과 이해도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왜 W나 다른 연인들이 주지 못한 말을, 감정적 유대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Y가 줄 수 있었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나왔다. W는 가해자 그룹과 시각을 공유하고 연대하지만 Y는 여성으로서 피해 당사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Y에게는 비슷한 형태의 피해 경험이 있지만 W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사자-피해자 그룹과 비 당사자-가해자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 듯 보였다. 비 당사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본인 존재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기 위해, 그 빈곤하면서도 과잉된 ‘카르텔 안쪽, 정상성을 지닌 평범한 사람’의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카르텔 내부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가해자에 이입한다. 이러한 이입의 규칙이 깨지려면 그간 가져왔던 관계의 힘이 카르텔 내부에서 사회적으로 생존하려는 욕구보다 더 강력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생존욕보다 더 강한 것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간의 연인들에게, 나는 그들의 생존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아주 작은 존재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그렇다. 타인의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들은 그 경험이 나의 것과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빠른 속도로 반추한다. 타인의 이야기가 내가 가진 이야기와 어느 정도 닮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공감하고 나서 연대한다. 연대의 필수조건은 공감이다. 당사자로부터, 그 당사자인 스스로를 찢고 세상에 드러나 또 다른 당사자에게 닿아지는 발언. 나는 이것을 연대의 근본적인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

    연대의 경험은 연대하는 집단에 속한 모든 개인을 강하게 만든다. 그 테이블에서 Y와 S와 나는, 그 순간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연대였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서 또 살아 견딜 힘을 얻었다. 그 힘이 가져지기 전까지 A를 용서하는 것은 삶 전반에 걸쳐진, 너무나 양이 많고 고통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졌었다. 물론 아직도 나는 용서의 교착에 빠져있고, 권력적이지 않은 용서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내가 생존하여 나의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있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또 다른 당사자들이 곳곳에서 나와 연대하기 때문에, 내가 완전한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더라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지금 현재까지도 이 일은 미결이다. 미결인 채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당당히 A의 앞에 가서 속죄를 요구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사이다’ 역할은, 나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미묘한 확신도 든다. 어쨌건 나는 지금 이 글로써 A의 존재를 고발했다. 알면서도 방관하며 나를 아프게 했던 W의 존재를 밝혔다. 그들이 이 글을 읽게 되고 A와 W와 또 다른 방관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스스로임을 알더라도, 그들은 내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제 그것들의 고해성사는 중요하지도 않다.

    이 일을 끝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가해자이자 친구인, 그간 내가 어려울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어깨를 빌려주고 마음을 써주었던 A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을 고민하면서도 나의 삶은 끝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여기까지 이어져 왔다. 미결인 과거에 붙잡혀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살아서 나와 연대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살아남아주어 고맙다, 이 글을 읽어주어 고맙다, 힘이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많은 이들의 마음에 빚진 고발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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