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와 마르셀라: 감히 정상가족을 모욕한 죄 / by 연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가톨릭에 의해 동성혼이 엄격히 금지되고 중형으로 다뤄졌던 1900년대 초 스페인 수녀원에서 학생 신분으로 처음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엘리사와 마르셀라 두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

(실제 엘리사와 마르셀라)


‘허영은 결점이다’


    1898년 스페인, 마르셀라는 가부장적이고 통제욕인 아버지, 그 곁에서 항상 숨죽이며 지내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라코루냐에 있는 수녀원 내 미션스쿨에 입학하게 되고, 수녀원에서 지내던 엘리사와 첫 만남을 가진다. 우산을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아 비에 흠뻑 젖은 마르셀라를 엘라사가 닦아주면서 두 사람의 마음도 비에 흠뻑 젖으며 사랑이 시작된다.


    ‘허영은 결점이다’라는 학훈이나, 수업시간에 ‘그’(남성명사)와 ‘그녀’(여성명사) 대명사를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장면은 앞으로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엘리사는 마르셀라에게 ‘술탄의 총애를 받기 위해 모든 여자가 투기질을 하는 하렘에 사는 기분인데 정작 술탄은 코빼기도 안 보여. 난 마리아도 하나님도 안 믿어. (중략) 난 살아있는 것만 믿어’라고 말하는데 그 말들이 나에게는 마치 ‘마르셀라, 바로 너처럼 내 앞에 존재하는 것만 믿어’라고 고백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엘리사의 잔망을 시작으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마르셀라는 잠들기 전 엘리사에게 할 내일 아침 인사를 연습하기도 하고, 우산을 챙기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다음 날 아침 우산을 챙겼지만 일부러 두고 가 비를 쫄딱 맞은 채로 다시 엘리사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언젠가 말을 사줄게’ ‘내 몸은 점투성이야’ ‘때가 되면 나한테 보여줄 거야?’라는,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는 미래 지향적인(?) 은밀하고 설레는 약속들을 하는 그 둘은 정말 사랑스러움 그 자체가 아닐까. 그 후 마르셀라의 부모님에 의해 둘은 생이별을 하게 되고 그 이별의 시간동안 서로에게 마음을,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키워간다.


    서로의 마음을 글로 담은 편지에서는 유독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서로에게 서로만이 살아있는 존재인 이 둘에게 사랑을 꿈꾸고, 욕망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은 허영이 아닌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녀’라는 대명사만 있는 세상에서 둘의 마음은 치명적인 결점을 담은 허영으로 읽혔다.


‘마르셀라, 다른 삶을 선택해도 돼. 평범한 삶. ‘난 너랑 있어야 평범해.’


    숱한 시간을 지나 선생님이 된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다시 함께 하게 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둘을 고깝게 보며 둘의 수업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고 단체로 집을 부수며 심지어 마을남자는 마르셀라에게 젠더 권력이자 물리적 폭력을 동시에 휘두른다. 두려움에 고통치던 둘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엘리사는 본인의 죽은 사촌인 마리오(남성)가 되기로 한다. 마리오가 되어 나타난 엘리사는 마르셀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마르셀라는 ‘정상’부부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마을 남자를 이용해 임신을 하게 된다. 함께 있는 게 ‘평범한’ 삶을 위해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이성애 규범이자 젠더규범을 둘의 관계를 맞추고자 한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오의 정체가 엘리사라고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둘에게, 엘리사에게 ‘정말로’ 남성임을 증명하라며 압박을 해오고, 결국 둘은 스페인 마을에서 도망치게 된다.


포루투 1902년 ’나는 자웅동체입니다.’


    스페인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둘은 포루투에 잠시 정착하게 된다. 마리오로 변장한 엘리사는 조용한 곳에서 안전하게 재단사 일을 하고 마르셀라는 임신한 몸으로 힘들게 주방 허드렛일을 한다. 스페인은 복장 도취, 신성모독, 신분도용, 그리고 '올바른 가족'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둘을 끝까지 쫒았고, 결국 포루투에 범죄자 송환을 요청한다. 포루투의 교도소장은 엘리사가 여성임을 알아보고 본인을 자웅동체라고 말하는 엘리사를 회유한다. ‘당신이 엘리사인지 마리오인지 상관하지 않아요. 다만 당신이 망나니 같은 남성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드레스를 입고 오세요’라고 말하는 포르투 교도소장의 모습은 비록 권위적이긴 했지만 엘리사가 남성 감옥에 들어갔을 시 겪을지 모를 위험을 차단하고, 엘리사와 마르셀라가 같은 여성 감옥에 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엘리사는 교도소장의 도움으로 마리오가 아닌 엘리사의 모습으로 마르셀라의 곁에 있게 되었고, 우습게도 감옥 안에서 그제야 둘은 서로의 진정한 이름으로 함께 있게 된다. 감옥에서 같이 있는 엘리사와 마르셀라. 세간에선 스페인에서 차별받았던 그 둘의 이야기가 떠돌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루투와 스페인의 관계는 좋지 않았기에 포루투 사람들의 ‘동정’을 얻는다. 특히나 그 지역의 여성들이 교도소 안에 있는 둘에게 지속적인 선물을 보내오고 감옥 안의 사람들은 그 둘을 매우 아껴준다. 감옥 안에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니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둘. 그러다 엘리사는 출산을 하게 되고 딸인 ‘아나’가 태어난다.


    스페인은 포루투의 주지사에게 두 범죄자를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포루투 주지사는 교도소장을 불러 ‘합법적’으로 둘을 탈옥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와중, 교도소장과 간호사는 폐렴에 걸린 아나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쇠약해진 마르셀라와 엘리사를 의사의 처방 하에 집으로 데려와 간호를 한다. 소장은 엘리사에게 석방을 조작해 탈옥할 것을 권유하고, 엘리사는 매우 기뻐한다. 희망에 찬 엘리사와 달리 마르셀라는 따스한 햇볕이 드는 집을 바라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감옥 안에 있고 싶어, 감옥 밖으로 나가고 싶어


    주지사와 교도소장의 권유로 둘은 감옥을 떠날 준비를 한다. 하지만 마르셀라는 비록 습하고 좁았을지언정 어느 때보다도 온전히 자신들로 있을 수 있었던 감옥을 떠나 엘리사와 딸 아나와 함께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밖에서 둘의 ‘꿈’과 ‘삶’은 그저 허영이며, 범죄일 뿐이다.


    ‘밖에선 우리를 구경거리로 알아. 우리들을 영원히 비웃을 걸’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마르셀라의 말에서도 그녀의 마음이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르셀라는 늦은 밤 엘리사와 함께 탈옥 아닌 탈옥을 한다. 아이가 없던 교도소장과 간호사 부부에게 아나를 맡기고 마르셀라는 다시는 아나를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마차에 오른다. 그러나 마차가 출발하고 아나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꼿꼿이 앉아 있던 마르셀라는 포효와 같은 절규와 함께 엘리사에게 무너졌다. 감옥이라는, 역설적이게도 둘에게 안정을 주었던 공간과 사랑하는 딸을 뒤로 한 채, 그렇게 둘은 무사히 포루투를 떠난다.


    감옥 밖으로 떠난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에서 영화의 시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 아나의 뺨을 마르셀라가 가만히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오고, 곧 말을 타고 등장하는 엘리사를 반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감옥을 나가기 주저했던 마르셀라. 딸마저 두고 가야 했던 그 마음이 아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에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동시에 말을 타고 온 엘리사를 반기는 마르셀라의 모습에서, 감옥 밖을 나가 둘이 서로를 ‘꿈’꾸며 이야기했던 삶을 이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허영’이 결점이 아닌 꿈이 되어가기 위해서


    영화는 그 어떤 색도 담지 않겠다는 듯이 흑백으로 제작되었는데 색깔이 영화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흑백으로 제작되어서 시각적으로 불필요한 자극을 덜어내고 내용의 근본에 몰두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다양한 ‘경계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달팽이’, ’미역’, ’자웅동체’가 함유하는 모호한 경계, 남장을 한 엘리사는 상대적으로 편한 재단사 일을 하고 임신을 했지만 주방 허드렛일을 하는 마르셀라의 모습에서 보이는 젠더 경계,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이유만으로 ‘창녀’라고 매도되는 장면에서 보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경계까지 다양한 경계 지점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이유로 낙인찍고 모욕을 일삼는 모습과, 이후 ‘정상가족’으로 살기로 한 엘리사와 마르셀라에게 ‘너희가 정상가족이라는 걸 증명해봐’라며 또다시 모욕을 일삼는 행위는 유독 내 관심을 끌었다. 이 두 태도가 사회의 질서에 맞지 않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허영’을 가진 결점적 존재로 낙인찍고, 낙인찍힌 자들에게 무결점을 요구하는 순환적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정 섹슈얼리티와 ‘다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결점이 있는 존재로 낙인찍고, 또 무결점을 요구하는 권력. 그 권력의 민낯이 보이는 듯 했다.


    영화에서뿐 아니라 나는 혹은 우리는 그러한 장면들을 많이 보아왔다. 폭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듯이 가해자가 그리고 제 3자가 피해자에게 혹은 ‘여성’에게 온갖 멸칭으로 낙인을 찍고, 또 동시에 무결점성을 증명하라고 저주를 퍼붓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저주와 모멸어린 말을 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허영이야말로 결점인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여성 퀴어의 경우, ‘여성’에서 한 번 ‘퀴어’에서 두 번 그리고 ‘여성퀴어’에서 세 번에 걸친 낙인의 과정을 거치고, 사회는 여성 퀴어에게 유독 심한 완벽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완벽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바로 허영 같은 결점을 지닌 존재, ‘창녀’가 되는 것이다. 


    누구든 완전할 수 없다. 사람은 늘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누구나 사회에 맞지 않는, ‘허영’을 가지고 있다. 겉모습뿐인 영화(榮華)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 ‘이제까지 그러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차별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멸과 낙인 속에서 커가는 허영의 권력 앞에서, 엘리사와 마르셀라처럼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을 고찰하고 그 행위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허영’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셀라가 고민 중에도 감옥을 떠나 엘리사를 반겼던 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질서 속에서도 스페인 계몽주의 여성작가 에밀리아 파르도바산의 ’요동치는 질문’을 읽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나도 어느 순간 허영에 젖은 결점투성이인 특정 집단이 될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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