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정체성 수난기(2)

   이런 나를 양성애자라고 부르는 게 맞았을까? 단어를 엄밀하게 따져보면 양성애(바이섹슈얼)라는 말은 여성/남성 양쪽 성(性)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니 말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상대방의 성이 아닌 그 사람 자체였다. 아니, 그렇다면 그 사람과 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개와 고양이가 다른 생물종인 것처럼 남성/여성은 확고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주장부터 남성,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다양하다는 말이 맞을까? 남녀는 각각 금성과 화성에서 왔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아주 오래된 시각이 사회의 주류를 이뤄왔고 그에 대항하는 시각들이 미미하게나마 생겨나는 중이라고 봐야지 맞는 것 아닐까. 나도 불과 2년 전에는 ‘생물학적 측면의 남성, 여성’이라는 말을 썼었다. 생물학적으로 생식 기관의 모습과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니 당연히 인간의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고등학교 생물학 시간에 인간은 남성, 여성이라는 두 성으로 분리되어 다음 세대에 자손을 남기는 유성생식을 하는 종이라고 배운 것이 생생했다.
 
    하지만 몇 권의 책들을 읽고 간성(Intersex)에 대한 이슈를 접하면서 생물학적으로 분리된 여성, 남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유엔(UN)에서 조사한 바로 전 세계 인구의 0.05~1.7%가 간성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신체적으로 남성, 여성으로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간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현듯 자연의 연속성이 떠올랐다. 빨간색과 주황색의 사이에 칼로 자른 듯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색깔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빨간색과 주황색은 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 사이에 있는 색들의 이름을 다 담지 못하고 있다. 색의 연속성을 생물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도감에 딱 맞는 식물이나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암술, 수술을 갖춰 피어나는 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신체들’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위치를 지정하기 힘든 촘촘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오로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틀 혹은 상)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몸들이 있고 나 또한 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않고) ‘여성/남성’ 둘 중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서 바라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들의 성(性)은 여성/남성 둘 중 하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심장이 요동쳤다. 여성/남성 둘 중 하나라는 성별이분법이 사라지면 몸들을, 성기들을 애써 여성/남성에 끼워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임, 미용 목적으로 (혹은 파트너의 성적 쾌감을 높이기 위해) 성기를 성형하는 일, 인식하는 성별과 신체의 성별을 다르게 느끼는 트랜스젠더 등등 그 모든 젠더와 관련된 이슈들이 떠올랐다. 성이 여성/남성 둘만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 아닌가. 언젠가 어떤 분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젠더는 철폐되고 그 자리를 섹슈얼리티가 차지하게 되겠죠.” 그 당시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인간의 성을 여성/남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그 다음에는 각자의 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각자의 성(性)-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 사회적 지위, 옷차림, 목소리, 행동, 말투에서부터 자신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성적 쾌감을 느끼는지, 상대방의 어떤 면에서 성적 끌림을 느끼는지 등등은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럴 것’이라고 추측돼왔다. 남성은 목소리가 낮고 페니스의 쾌감을 통해 섹스를 하며 여성은 꼼꼼하고 조신하며 섹스에 있어서 수동적이라는 것들 말이다. 젠더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은 둘로 나뉘어져있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성이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면-옷차림, 성적 끌림을 느끼는 방식 등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은 남성/여성이라는 카테고리(젠더)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섹슈얼리티가 젠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인간이 여성/남성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 또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성별부터 파악하지 않던가. 어느 저녁 어머니와 ‘6시내고향’이었나 ‘생생정보통’이었나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TV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VJ만 관찰하고 있었다. “무지야, 저 사람 남자인거 같지? 여자인가? 아니야, 아무리 봐도 남자인데.. 근데 또 목젖은 없다…”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부치, 드렉킹, 크로스드레서 등등 남성스럽게 하고 다니는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들이야 많았다. VJ분은 외모만 그렇지 이성애자일 수도, 혹은 외과적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일 수도, 아니면 남성적 외모의 레즈비언일수도 있었다. TV 화면만 봐서는 VJ의 섹슈얼리티가 무엇일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가능성은 넘치고 넘쳤다. 확실한 점은 어머니의 반응이 증명하듯 전형적인 여성/남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에 혼란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엄마, 나도 작년에 머리 짧게 자르고 바지만 입고 다녔잖아. 나는 안 저랬어?” 그랬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 또한 가슴이 전혀 티 나지 않는 옷차림과 귀가 보이는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녔던 것이다. 멋을 낼 때도 바지정장을 입었다. 이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머리 좀 기르라며 (그래야 남자를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지) 잔소리를 했고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다른 여성들이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VJ의 속사정은 몰라도 내가 ‘남성 같은’ 차림을 하게 된 이유는 강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자르면 주변에서 나를 연약한 여성으로만 보지 않을 것 같았고 나 또한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면서 강한 느낌을 받고 싶었다. 긴 머리가 지겹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가녀린 여성)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어이없고 웃기지만 머리를 자른 후에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와 여유로움을 자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남성 젠더가 여성 젠더보다 강하고 자유롭다고 보는 것은 차별적인 시각임에도 내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성 젠더를 흉내 내면서 나는 ‘가녀림’이 내 본성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볼록한 가슴, 버자이너 이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체를 타인들에게 드러내는 장소 외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이라고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정시켜 놓는 것보다 훨씬 내면의 에너지나 가능성, 의지 면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다. ‘너는 여성이야, 남성이야?’ 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성이라는 답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중화장실이나 공중목욕탕, 수영장 탈의실에서는 이 질문을 필연적으로 들었고 나는 여성임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질문 자체가 왜 필요한지, 굳이 왜 한 쪽을 선택해야하는지 반발심이 들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되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중립 화장실 앞에서는 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판단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여성/남성 둘 중 하나로 나 스스로를 재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안에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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