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체성 수난기(1)
- 어쩌다 퀴어: 무지
- 2019. 8. 9. 17:03
언젠가부터 자기소개가 참 어려워졌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말하는 것들,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같은 것들은 말하는 지금에야 그렇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 패션잡화MD, 선생님, 마케터 등으로 직종을 뛰어넘어 직업을 바꿔왔다. 지금 하는 일은 또 다르고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그 후에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직업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는 곳이나 음식 취향은 어떨까? 무엇을 말하든 한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다.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긴 시간동안은 연애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고 어느 때는 남성을 만났으며 어느 때는 여성을 만났다. 이 모습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슨 ‘성애자’란 말인가.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제 꾀에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지난 10여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처음 참가했던 스물셋의 여름이었다. 서울퀴퍼(퀴어퍼레이드의 줄임말)의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을 때였는데 혐오세력이 퍼레이드를 쫓아다니며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중 ‘이성애는 정상이고 너희들은 비정상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화가 나서 피켓을 흔들며 ‘나는 이성애자인데 그럼 나도 비정상이냐’라고 소리 질렀다. 나도 당신이 말하는 ‘정상-이성애’이지만 ‘비정상-퀴어 속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외친 말이었다. 의도야 어떠했든 나는 그 순간 ‘이성애’라는 속성을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퀴어퍼레이드 행렬에 동참하고 있지만 나는 퀴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이때의 일화를 지난 10년간 두고두고 놀렸다. “이성애자라고 소리 지를 때는 언제고. 푸하하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너무도 흔한 만큼 잊기 쉬운 모양이었다. 현재의 자신을 자신하더라도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겸손과 경계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이성애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큰 고민이 없었다. 그 때까지 연애를 딱 한 번 해봤는데 남성이었으니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이성애를 당연하게 여기고 또 이성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질문을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그 남성을 사랑하는 게 정말 맞아? 어떻게 ‘다른 성별의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어? 같은 질문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건 되돌아볼 기회를 잃는 것이다. 그때 질문을 들어 고심했더라면 달랐을까 싶긴 하지만 경험이 없으니 결론은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주변에 퀴어인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어떻게 같은 성별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라는 바보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지켜봤고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사랑과 견주어볼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연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성별만이 다를 뿐이지. 그럼에도 성별은 커다란 차이 같았다. 나는 여성에게 끌리지 않으니 이성애자라는 생각(확신)이 들었다.
그랬는데 이십대 중반이 끝나갈 무렵, 여성과 연애하게 되었다. 한동안 양성애자라고 생각했다. 이성애 정체성이 깨졌지만 남성을 전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양성애자라고 나 자신을 정의내리고 보니 재미있는 상상이 됐다. (해준다는 사람도 없었으면서) 소개팅 제의를 받는다면 남성을 소개해 달라고 해야 하나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 것이다. 가시적으로 사람은 남성 아니면 여성에 꼭 포함이 되었고 그 중 어느 성별이 더 좋은지 선택권이 주어질 때 나는 어느 젠더를 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위화감을 주었다. 연애하고 싶은 상대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젠더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소개를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로맨틱한 끌림이 생기길 기대하며 인위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꼭 따져야 할 조건으로 젠더가 들어갔던 것이다. 젠더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안 생길 것이라 미리 판단하고 있었다. 남녀가 붙어있으면 항상 정분이 난다는 사고방식 아닌가. 아주 이상하고 부적절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소개팅 주선자의 입장이 된다면 어떤 젠더를 만나고 싶은지 결정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준다는 건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어떤 젠더를 소개받고 싶은가 고민했다. 고민의 끝은 항상 같았다. 젠더는 상관없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모든 연애가 그랬다. 내가 끌린 부분은 남성, 여성이라는 그들의 젠더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각, 청각, 후각 등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이기에 분명 그들의 외모, 옷차림, 목소리, 체취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옷차림, 목소리라면 남성, 여성이라는 젠더로 구분되어 있는 분야 아니던가. 영향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예쁜 여성, 멋있는 남성이어도 대화를 나누고 지내면서 끌리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상대방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의 독특한 주고받음에서 로맨틱한 끌림을 느꼈고 연애관계로 발전했다. 상대방의 삶의 이야기, 성격 등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상대방에게 빠져 만나고 보니 남성이었고, 여성이었다. ‘네가 남자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 해’라는 어느 오랜 드라마 대사처럼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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