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아마 내가 더 좋아하나 봐요.”(내편이 아닌 남편) by 유영순
- 묵혀온 시간의 방
- 2020. 9. 28. 22:38
“괜찮아요. 아마 내가 더 좋아하나 봐요.”(내편이 아닌 남편)
- (2019. 2. 2.) 유영순(68) -
by soon
“니 어디 갔다가 두 시간이나 있다가 오노!”
그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펴지지 않는 주먹을 힘껏 쥐고 화를 내며 거실로 나온다. 곧장 한 주먹 날릴 기세다.
“어디 갔다 오기는… 새벽 예배 갔다 오지.”
“두 시간이면 부산을 갔다 와도 될 시간이다. 니 옛날 애인 부산 살았잖아!”
칠원, 남지, 함안, 근교의 지역들을 다 들먹인다.
“왜 그러노? 당신 요즘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오늘 새벽도 여느 때처럼 나를 기다렸나 보다.
“거실에 불은 켜 있는데 사람이 없대?”
“오자마자 쓰레기 버리러 갔었다.”
“그래”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간다.
8년 6개월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우리 남편. 집중치료실, 재활병원을 거쳐 집으로 온 지는 2년 6개월째다. 쓰러진 후 회복되어가면서 정신적인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았는데 -오히려 웃고 울고 예전보다 감정을 잘 표현해서 좋아 보였다- 요즘은 자꾸만 이상해진다. 얼마 전에는 “앞날은 생각하게 되지도 않고 지난날이 후회만 되고 계속 의심이 생긴다.”라고 중얼 거렸다.
생각해보니 한 달 전쯤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차로 가면 금방 볼일 보고 올 수 있는데 한번 외출하면 두 시간은 걸린다든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짓을 하는지 집에만 있는 자신은 알 수가 없다는 둥, 그때부터 끊임없이 의심하고 심통을 부렸다.
남편이 처음 쓰러졌을 때 나는 내가 건강하고 씩씩해야 환자를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노력해왔다. 5년 가까이 병상 밑 간이침대에서 생활했었고, 외출을 해도 두 시간 이상은 비우지 않았다. 또 남편 식사 시간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어디를 가든 내가 가는 곳엔 당신, 당신 가는 곳에 나. 우린 한몸이기에 같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내가 가는 곳에 가기 싫어해 매번 포기하고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고 있는 나를 그가 의심하고 있다. 더군다나 불륜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 놓을 데가 없다는 것이 참 슬프다. 딸의 권유로 모임을 다녀보기도 했지만 잘 어울리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 처한 상황이 내 숙명이고 운명이라고 말하면서 모임 자리에서 항상 먼저 빠져나와 남편에게 가야 했다.
언젠가 남편 성격을 조금 아는 김집사가 짝지 괜찮냐며, 심술궂게 굴지는 않느냐고 물어왔다.
“괜찮아요. 아마 내가 더 좋아하나 봐요. 안 됐다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좀 더 잘해 주고 싶어요.”
얼마나 답답할까? 팔, 다리 마음대로 쓰지 못하지. 날씨따라 기분따라 외출도 못하지. 아내가 살갑기를 하나. 종일 티브이, 인터넷만 보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겠지? 오늘은 용기 내어 바람 쐬러 가자고 하며 나왔더니 왜 하지 않던 짓을 하냐고 시비다.
내가 남편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나이 많고, 돈 없고, 인물 없으니 오라는 사람도 없어서란다. 내가 떠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자기 곁에 올 기회도 안 준단다.
일흔이 넘은 우리 남편. 일흔이 코앞인 나. 치매가 아니길, 의처증이 아니길 빌면서… 또 더 이상 진행되질 않길 빌면서…
오늘도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고 싶다.
by soon
└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유영순" by 정수
엄마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년쯤 된 것 같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부터 모든 것을 아빠 중심으로 생활하게 된 엄마가 나는 항상 더 걱정이 됐다. 잠깐이라도 엄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 또래들이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수업에 나가기를 설득했고,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글쓰기를 통해 나는 그제야 엄마에 대해서 좀 더 알아갈 수 있었다.
어설프고 구구절절하기도 하기도 하고 놀라울 만큼 감동적이기도 한 글을 써서, 사진으로 찍어 딸들에게 보내고 어떠냐고 물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항상 최선을 다해 칭찬을 해줬는데 그러면 또 믿지를 않으셨다. 언제나 자신은 너무 모자라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자신만 너무 부족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엄마의 이야기는 두꺼운 노트 여러 권이 되었다.
이 글을 쓰고 1년 후 엄마는 유방암 판정을 받았고, 지금 암 투병 중이시다. 서울로 치료를 다니는 와중에도 항상 아빠 걱정을 하신다. 아빠 때문에 힘들다고 속상해 하시면서도 언제나 아빠가 1순위인 게 너무 답답하고 속상했다.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많이 화도 나고 엄마가 이해도 잘 안 됐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의 일기 같은 글들을 읽고 내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 한층 가깝게 지내다 보니, 엄마의 삶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엄마도 엄마만의 방식으로 고통을 다스리고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를 무시하고 내 방식을 강요하려 했던 것 같았다.
엄마가 쓴 글들에는 내가 몰랐던 엄마가 가득하다. 나와 정말 비슷하기도 하고 또 생각하지도 못한 모습들이 숨겨져 있다.
이번 기획은 우리 엄마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엄마와 비슷한 삶을 사는, 혹은 엄마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을 위해서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하다.
그들은 대부분 배움의 기회도 적었고 자신의 마음을 비밀스럽게 숨기며 살아왔다. 그들이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렇게 묵혀온 이야기들을 듣고 공유하는 시간을 통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훌륭한지 보다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기해 죽겠다 - 2017.어느날
유영순
좋아 죽겠다.
미워 죽겠다.
골치 아파 죽겠다.
죽겠다, 죽겠다. 죽을 일도 참 많다.
요즈음 우리 집에도 죽을 일이 생겼다.
엄마인 내가 글자 쓰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글 쓰는 재미에 빠져 신기해 죽겠고
아빠는 샘이 나서 죽겠고
시도 때도 없이 평가해 달래서 언니는 귀찮아 죽겠고
재미도 없는 걸 계속 받아보는 동생은 바빠 죽겠고
죽을 일이 많은 우리 가족.
칭찬만 해주는 우리 큰딸 고마워죽겠다.
아리송한 반응 보이면서 답해주는 작은딸 이뻐 죽겠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글짓기 ‘수’ 한 번 받은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후로 일기도 쓰지 않았었는데
아무것이나 쓰고 싶은 나
정말 신기해 죽겠다.
내 자신이 궁금해 죽겠다.
마음이 붕 뜬다.
감격에 감격이 더해져 행복해 죽겠다.
기뻐 죽겠고
배 아파 죽겠고
속상해 죽겠고
죽을 일이 많아 죽겠다.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걱정되어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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