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표 비우기 by 이소


 



    종이로 된 스케줄러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예전 같으면 연말이 될 때마다, 다가올 새로운 해에는 야무지게 살아본다는 결심의 증거로서 스케줄러를 사곤 했다. 하지만 그건 늘 연초에만 부지런히 사용될 뿐 여백투성이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이제는 모바일 캘린더 앱을 사용한다. 작년까진 텅 비어있었는데, 기획하고 벌린 일이 많아진 탓에 지금은 캘린더가 빈틈없이 꽉 차 있다. 방 청소나 일기와 같은 주기적인 생활은 회색, 보통의 일정은 진회색, 외주 일정은 초록색, 마감은 빨간색, 에세이는 하늘색, 분홍색, 갈색으로 표시해두었기에 캘린더는 알록달록하다. 이번 달엔 외부 업무가 9개나 잡혔고, 에세이 3권 출간 준비, 외주 2가지, 새로운 기획 미팅 2건이 잡혔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글쓰기 모임과 시나리오 읽기 모임을 나가게 되었고, 친구와의 약속은 9개 잡혔다. 느긋하게 쉬면서 작업하던 나에겐 무척 폭풍과 같은 11월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 정도로 밀도 높은 일정을 소화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에게 온 기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놓치고 싶지 않아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왠지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무기력하던 예전의 나와 달리 활력도 많이 붙었고, 작업에 관한 회의감이나 무가치감도 느껴지지 않고,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으니까 이 기회는 어쩌면 내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11월 중순이 되어갈 동안 매일 외출했다. 그리고 저번 주 목요일 친구 CS 작가님 댁에 놀러 가게 되었다.

 

 

 

    S 작가님 댁의 구조는 무척 특이하다. 현관문을 열면 그 현관문 폭만큼의 넓이로 계단이 20개 정도 늘어서 있는데, 그 계단 끝에 방문이 있다. 계단에 신발을 벗어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면 책으로 둘러싸인 작업 공간이 보이고, 벽엔 넝쿨이 박혀있다. 넝쿨 사이에는 작가님께서 그린 초상화와 금속 나비 장식이 걸려있다. 그 매혹적인 공간을 지나면 거실이 있다. 식탁에는 작가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월남쌈 재료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버섯볶음, 애호박, 당근, 우엉, 양파, 단무지, 토마토가 알록달록 싱그러웠다. 식탁 위에 내가 사 간 음료를 올려두고 작가님과 근황을 나누는 사이, C도 금세 도착했다. C는 꽈배기와 딸기 찹쌀떡을 사 왔다. 식탁이 더 무거워졌다. S 작가님과 C,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서로를 무척 아낀다. 셋의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이렇게 만난 걸 보면 정말 운명은 있는 것인가 싶게 생각된다. 분명 도심인데도 셋이 앉아있는 공간은 조용하고 아늑하기만 했다. 시간이 멈춘 방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작가님께서 가운데 그릇에 라이스페이퍼를 담글 뜨거운 물을 부으시고, 본격적으로 월남쌈을 먹기 시작했다. 월남쌈에 애호박 볶음을 넣어 먹은 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먹고 또 먹고. 끊이지 않고 대화 나누면서도 부지런히 배를 채웠고 후식으로 꽈배기와 찹쌀떡도 먹었다. , 배불렀다.

 

 

 

    배를 채우고 식탁을 치운 후엔, 셋이 함께 컬러 코칭을 하기로 했다. 작가님께서 색상으로 심리를 파악하는 컬러코칭을 하실 수 있으시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나 자신의 행동 패턴 등을 체크한 후, 이를 색상으로 표현해보았다. 분석지를 다 푸는 데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분석지를 풀어나가며 식탁 위에 놓인 간식을 끊임없이 먹었다. 내가 너무 잘 먹어서 작가님께서 견과류와 말린 자색고구마 칩을 자꾸 채워주셔야 했다. 배부른데도 입을 쉬면 안 될 것 같아 먹었는데, 나중에 그 견과류가 상한 걸 알게 되었다.

 

 

 

    분석지 풀이가 끝나고, 이제 그래프로 나타낼 차례였다. 항목마다 자신이 원하는 색깔로 원하는 칸만큼 채우는 방식이었다. 나는 일, , 자기애, 사랑 항목에는 빨간색으로 칠해 넣었고 자유, 놀기, 자기 성장에는 샛노란색을, 인간관계와 친구에는 주황색을 채웠다. 신기했다. 몇 년 전 컬러코칭을 했을 때는 꽤 다양한 색깔로 칠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강렬한 색상만이 내 마음에 끌렸다. 완성된 그래프를 보니 마치 불타고 있는 듯했다. 누가 봐도 일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헌데 환경과 자원 항목은 갈색으로 금방이라도 소진될 것처럼 적은 칸을 확보하고 있어 문제였다.

 

 

 

    작가님께서 이 모습은 그래프가 지금 나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번아웃의 위험이 보인다고 하셨다. 지금 내 속은 달려 나가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자원은 그리 풍족하지 않아 타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내 한계가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밖으로 꺼내 눈으로 확인하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작가님은 내 속도를 찾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지금 여러 상황에 휩쓸린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결국 중심을 잘 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이 상황들은 결국 다른 이가 아닌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조급한 마음에 속도만 내다가 일을 그르치기 전에, 여유를 가져야 했다. 피부밑이 간지럽도록 불안했던 마음에 뻔뻔한 용서가 필요했다. 일을 열심히 하는 나도 가치 있지만,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나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좀 더 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다.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충만해졌다. 몸속 위는 채울수록 무거워지는데, 마음은 채울수록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되레 용기가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이번 달 보기로 했던 연극을 취소했다. 친구와의 통화를 줄이기로 했다. 혼자 가려 했던 부산 여행을 미루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안 되었고 나는 불을 끄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발을 쭉 뻗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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