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이와 할아버지 by 이나






 

    요즈음 잇몸이 시린 정도가 아니라 냉장고에서 갓 꺼낸 반찬을 한입 씹고는 몸서리를 치는 수준이라 치과를 갔더니, 치경부마모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칫솔질을 가로로 하는 경우(a.k.a 차인표의 분노의 칫솔질’) 잇몸이 파이면서 생기기 쉬운 질환인데, 내 경우는 두통 완화 목적으로 한 교정치료 과정에서 잇몸에 파묻혀 있던 치아의 뿌리가 드러나는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칫솔질만큼은 일찍부터 제대로 배웠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배웠다기보다는 관찰해 스스로 터득했다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칫솔질을 마치 신성한 의식마냥 정성 들여서 하던 모습이 칫솔질을 할 때마다 떠올라서, 이를 닦을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결코 의도하지는 않은 건조한 연상작용에 불과하지만.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할머니의 오랜 지병으로 젊어서부터 집안일과 양육, 경제활동을 병행하셨다. 건강 챙기기를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여겼고, 자신이 구축한 체계가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안 된다는 완고함은 타고난 성격과 상황의 합작품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할아버지의 관심사는 조상의 덕을 기리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덕분에 나의 아버지에게 부부관계에 금이 가도 제사 지내는 것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줬고, 자기 자식을 예뻐하는 모습을 부친에게 보이는 것을 불효라 여기게 하여 명절에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는 나와 오빠를 본체만체 했던 것 같다. 기제사와 차례를 극진히 챙겨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이어서, 명절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등살에 말 그대로 빡친엄마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고는 했다.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할아버지와 직접적으로 얽힌 기억은 거의 없다. 더더군다나 좋은 기억 따위는 없다. 아마 할아버지에게 나는 그저 장손이 낳은 장남 뒤에 나온 부차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무렵, 명절을 맞아 분주한 주방에 도움이 될까 싶어 서성이다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빈 상과 할아버지만 있던 거실로 쫓겨났는데, 상을 마주하고 할아버지 앞에 앉았더니 그 노인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 사람은 자기 앉을 자리를 잘 보아가며 앉아야 한다고. 인자한 표정으로 읊조린 냉랭한 한 마디는, 아무리 사태파악이 안 되어도 일단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해서 벌떡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종종걸음 쳤던 기억이 선하다. 지금이야 그게 어린 손녀한테 할 말이냐며, 어딜 고상한 척 막말이냐며 맞장뜨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때의 난 너무 어렸고 순진했다.

 

    손녀를 그저 외부인 취급하던 할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문의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첫 번째 이직을 했는데, 새로운 직장이 삼성전자 협력사였다. 삼성 부지 안에서 상주하며 PC와 노트북 사용설명서를 제작하는 일을 했는데, 부친은 앞뒤 설명 잘라버리고 할아버지에게 내가 삼성에서 일하게 됐다고 근황을 전한 모양이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옳다 할 수도 없는 말로 인해, 이메일에는 황홀과 감격이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A4 한 장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핵심은 이랬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에 입사하다니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의 손녀야! 조상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헛웃음이 멈추질 않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새삼 그의 세속적 사고에 객관적으로 감탄했다. 내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라는 대로 그 대기업의 일원인 척, 할아버지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난 굳이 난 할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쪽을 택했다. 이제야 내가 자랑스러워진 할아버지에게 난 보란 듯이 답장을 했다. ‘당신께서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일개 병 내지는 정 신분의 미천한 톱니바퀴일 뿐인데 오해를 하셨군요.’ 답장은 없었고 난 왠지 모르게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을 부끄럽게 한 손녀가 못내 괘씸했는지, 그의 뒤끝은 무려 10년도 더 지나 나의 남편을 처음 보는 인사 자리에서 스며 나왔다. 예비 손주사위에게 애미가 잘못 가르쳤는지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닌 게 흠이긴 하지만 잘 부탁한다는 게 어디 할 말인가 말이다(물론 내가 이직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이 밖에도 환장할 우여곡절이 더 있었다. 그렇게나 건강을 끔찍이 살피던 할아버지는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신 뒤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정신적 온기는 부족한 여생을 보내다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연세가 있어서 굳이 수술로 떼내지 않고 지켜보며 다스리기만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암세포를, 본인의 고집으로 불필요한 수술을 했다가 돌아가신, 참 본인다운 결말이었다. 생전에 그토록 제례를 중시하더니 추석 연휴 중에 가신 데다, 퇴임식 때 받은 대통령 훈장을 본인과 함께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끝까지, 참으로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는 의무와 규율로 점철된 냉랭한 부자관계로만 보였는데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엉엉 소리를 내며 통곡하던 아빠가 낯설었고, 한 조각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던 나 스스로에게 서먹해 하다가 입관 후 연화장으로 옮겨지는 관의 크기를 보고 갑자기 서글픔이 몰려왔던 것 같다. 그 연배에 흔치 않은 180cm에 이르는 신장이었던 할아버지가 생각보다 너무 작은 관에 실려 있었다. 내 유년기에 냉소와 비관을 심어준 그 어른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연민이 담긴 눈물이 조금 나오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운 시집살이에 종지부를 찍은 엄마는 요즘도 할아버지를 살벌하게 씹곤 한다. 나도 동참하거나 관망하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생각도 든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를 닦을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톨의 불순물이라도, 하나의 충치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연함이 보이던 그 느리고 집요한 칫솔질. 내일 또 치과 예약이 잡혀 있고, 80이 넘어서도 틀니나 임플란트의 도움이 필요 없었던 그의 자기관리 능력이 왜 내게는 내려오지 않았나 아쉬울 뿐이다. 아마도, 손녀에게는 물려주기 아까웠나보다.




illust by celloph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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