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날 by 정수

 

by cellophane

 

 

    PM 02:35

 

    바람은 귓불을 날카롭게 스치지만 가장 볕이 따스한 시간이다. 회색 시멘트 바닥 위로 검은 운동화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산책하러 나온 지 3분 만에 돌아가고 싶어져 집으로 방향을 틀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회갈색 시든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서 멋들어진 나무를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지나치는데, 삼색 무늬 고양이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옹.”

    오늘 내가 처음 낸 목소리다. 빠르게 걷다가도 고양이 앞에서는 여지없이 멈춰 서게 된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궁금한 듯 눈이 동그래진 고양이가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도망간다.

    불안 때문에 얼얼한 추위에도 식은땀이 났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외투만 벗고 이불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는다. 오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다.

    매일 산책 연습을 하기로 다짐한 지 하루 만에 포기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 끈기도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지만 다시 용기 내지는 않는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겨드랑이 사이를 작은 주먹이 툭툭 친다. 품을 내어 주니 얼굴을 팔뚝에 걸친 채 그르렁거린다. 이제 한동안 꼼짝할 수 없다. 

 

    그래, 잠깐 자지 뭐.

 

   

    PM 04:50

 

   경직된 몸을 살짝 비틀자 고양이가 품에서 후다닥 빠져나갔고, 나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 대신 서리 낀 창가에 둔 차가운 콜라를 병째로 가져와 마셨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또 낮잠을 많이 자 버렸다. 7킬로그램에 2만 원 하는 싸구려 사료를 고양이 밥그릇에 채워 주고, 수시로 덜덜거리는 작은 냉장고에서 편의점 알바하는 친구가 매일 건네주는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꺼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신나서 받아 왔던 도시락인데 이제는 편의점 음식이 진저리가 난다.

 

   

    PM 06:30

 

    빈티지 의류와 잡동사니가 든 21인치 여행용 가방을 들고 좁은 4층 계단을 내려가서 10분쯤 더 걸으면 홍대 거리다. 이제는 거의 무용지물인 공중전화 옆 길가에 쪼그려 앉아 사람들이 구경하지 않는 물건들을 바닥에 꺼내 진열한다. 얼마 전 가방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왼쪽 다리가 아직 부어 있지만, 절룩거릴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이 정신을 살짝 맑게 해줘서 좋다. 계단을 굴렀을 때는 서러워서 펑펑 울었는데 마음이 꽤 후련해졌다.

    겨울을 많이 좋아하는데 이제는 점점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다. 겨울이 더 추워지고 있는 건지 내가 약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파는 물건은 지점토 위에 그림을 그린 열쇠고리와 얇은 나무판에 그림을 그린 책갈피, 그리고 빈티지 의류 몇 점이다. 해가 질 때쯤 장사를 나오지만 조명도 손님도 없는 노점이다. 친구와 함께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갑자기 연락 두절이 되었다. 망했다고 할 수 있는 노점을 계속 나오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는 모습을 주변 노점 상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림 그려요라고 나를 소개하지만 제대로 된 작품활동의 기회는 없는 보잘 것 없는 반백수라, 이렇게라도 전시하고 활동한다는 자기만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이렇게 거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몇 시간이 제법 즐겁기도 했다. 꿈을 이루는 과정 같다는 착각도 든다. 무엇보다 이 시간은 나만의 세상에서 마음 편히 사람들을 구경하고 꿈꾸는 유일한 시간이다.

 

    

    PM 10:05

 

   오늘도 역시 아무것도 팔지 못하고 여행용 가방에 다시 잡동사니를 집어넣고 집으로 향한다. 노점을 하는 과정에서 4층 옥탑에 여행용 가방을 들고 올라가는 이 일이 가장 힘들다. 언젠가 애인이 생긴다면 꼭 무거운 짐을 들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 번에는 냉동실에 얼려 둔 삼각김밥을 데워 먹었다. 난 삼각김밥을 제일 싫어한다.

 

 

    PM 11:30 

 

 

   어렵게 구한 24시간 책 대여점 겸 편의점의 새벽 알바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여자는 대부분 새벽에 알바를 써주지 않기 때문에 일을 구하기 힘들었는데, 최저시급 미만의 돈을 받는 조건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거리이고 워낙 간절했기 때문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새벽에는 손님도 드무니 책을 읽으면서 일할 수도 있다. 그래봤자 대부분 만화책이나 보지만. 

 

 

    

    AM 02:40

 

    딸랑.

    벨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지만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손님은 카운터로 와서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읽고 있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더니 모자와 마스크를 쓴 말라깽이 남자가 계속 웅얼거렸다. 알아듣기 어려워서 ?”라고 되물으며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니 그제야 남자의 손에 들린 커다란 칼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돈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 같다. “돈 다 꺼내고 바닥에 엎드려라고 강도는 말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돈을 있는 대로 다 꺼내고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그 와중에도 저 말라깽이에 발음도 안 좋은 녀석에게 이렇게 겁을 먹는 내 모습이 굴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강도는 금세 도망을 갔고 나는 그제야 보안 벨을 눌렀다. 몇 분 후 경찰이 올 때까지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로 CCTV를 확인할 수 없어서 경찰이 내게 인상착의를 물었는데 모자가 무슨 색인지 점퍼가 무슨 색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그냥 검은색인 것 같다고 했다. 주변을 잠시 수색해 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 강도는 찾지 못했다. 난생 처음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 말을 믿어주며 칼을 든 강도라 위험했는데 다행이라며 다독여줬다. 내 앞에 앉은 경찰은 새벽에 여자 아르바이트를 쓴 사장을 나무랐고, 내게는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어요라는 말은 속으로 집어삼켰다. 사장은 내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돈을 왜 싹싹 긁어 줬냐며 원망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죄인이 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안 벨을 조금 더 빨리, 몰래 누를 수 있지 않았을까. 돈을 조금만 건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인을 붙잡으면 연락을 주겠다며 이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냥 넋이 조금 나갔었던 것 같다.

 

 

     다음날 AM 11:50

 

    자고 일어나니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을 느꼈다. 이렇게 아플 수도 있는 걸까. 모든 뼈마디가 고통을 호소했다. 결국 노점을 나가지 않기로 하고 알바도 쉬어야 할 것 같아 전화했더니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허탈한 마음과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며 약국에 가려고 했는데, 알바 사장이 다시 연락을 해서 급여를 반만 입금했다고 했다. 그동안 계산이 안 맞은 차액을 뺐다고 했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났지만 싸울 힘이 없었다. 사실 그럴 용기가 없는 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는 내가 한 잘못들을 먼저 떠올리고 얼마만큼의 벌을 받은 것인지를 계산해 보곤 했다. 그러면 조금 덜 억울하다.

    나는 더 이상 추위에 떨며 노점을 열지 않기로 했고 알바하던 책 대여점이 불에 타길 기도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얼마 후 다른 저녁 편의점 알바를 구했다. 모자를 쓴 남자가 들어왔을 때 심장이 튀어나올 뻔 했다.

 

 

 

 

    20대 중반쯤 나는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고향을 떠났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남들 눈에는 우울증에 걸린 반백수 한량일 뿐이었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아빠는 편의점 알바나 하느냐며 한심해 했고, 내가 작가님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는 나를 비웃었다. 그동안 만나 온 알바 사장과 월세집 주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한심해 하는 그 많은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고 그때 그 강도가 잡혔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으며 내 저주 목록 역시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나는 내가 나름대로 잘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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