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과 시작

 

    은수 님에게,

 

    올해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잠깐 깨서 배달 음식을 먹고 게임기를 켜서 게임 동물 친구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다시 잤죠. 그 전날, 전전날부터 계속 그랬던 같아요. 작년의 끝과 올해의 시작은 잠만 잤다 되겠네요.

 

    작년은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든 해였고 저는 별개로 엄마의 유방암 진단으로 건강에 대해 많이 공부한 해였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가장 많이 곳이 세브란스 병원과 서울역이었네요. 엄마의 보호자가 되는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 고생한다는 사실, 아니 다들 고생한다고 생각해줄 거라는 사실에 조금 만족했던 같기도 해요. 마음을 돌아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글의 시작부터 조금 우울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이렇게 어제와 같은 오늘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좋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작년에는 우리가 함께 새해 계획을 세웠는데 기억나요? 올해는 작년에 세웠던 계획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어요. 여름 즈음까지 대충 쓰다가 작년 다이어리를 펼쳐 보니 의기양양한 새해 계획이 적혀 있는데 개도 지킨 없더라고요. 시국 탓도 있겠고 억지로 성공이라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양심상 개도 없어요. 하지만 가장 먼저 계획했던 주눅 들지 않기 조금 성공한 같다는 기분도 들어요. 클라이언트에게 처음으로 반발도 해봤거든요.

 

    은수 님의 작년 끝과 올해의 시작은 어떤 기분이었나요?

 

    얼마 우리, 올해는 스스로 대견해하고 자랑도 하자는 다짐을 했잖아요. 매번 무심코 시작되는 자기비하와 칭찬 대결이 지겨워서 말이에요.

 

    저는 작년이 칭찬을 많이 받은 해로 기억돼요. 지금까지는 칭찬받은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전에는 칭찬을 받아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던 아닌가 하는. 조금씩 자연스럽게 제 자신을 칭찬할 있게 되면서 칭찬도 받아들일 있게 아닌가 싶은 거죠.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제가 변하고 있나 봐요. 올해의 이 다짐,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자랑하자는 다짐이 앞으로도 지켜지면 좋겠어요. 우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많은 여성들도 함께요.

 

    칭찬하는 법도 많이 배운 같아요. 그동안은 칭찬은 사람의 취향이고,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니 칭찬에 연연해하지 말자고 생각해왔거든요. 내가 진심으로 좋다고 느끼지 않는데 칭찬하는 가식인 같아 진중한 말을 아껴왔던 같아요. 근데 칭찬에는 그런 의미만 있는 아니라는 이제 알아가요. 제가 너무 좁은 생각에 빠져있었죠. 사실 누구든 칭찬받는 좋아하잖아요? 취향과 상관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싶을 , 위로하고 싶을 , 관심을 표현하고 싶을 , 다들 그런 식으로 칭찬을 사용하기도 하는 같아요. 칭찬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별개로, 상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칭찬을 잘하고 싶어서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노력해서 그냥 칭찬이 아닌, 뭐랄까 감동적인 나만의 칭찬을 잘해서 사랑받을 계획이에요. 이렇게 저의 은밀한 계획이 들통 나네요.

 

    30세가 저는 죽음을 바랐는데, 지금 얼마 남은 30대를 돌이켜보니 그동안 노력해 것에 대한 보답 같은 시간이었던 같아요. 그리고 이제 40 바로 코앞인데 저는 그동안 많이 노력했으니 어떤 보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무섭지 않아요. 건강만 지킨다면요. 아직 날이 많이 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P.S. 우리는 이제 만난 3년째인데 30년째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요.

 

      언제나 칭찬받고 싶은 정수가

 

 

 

illust cellophane


정수님께,

 

    며칠 편지를 받고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이제야 답을 씁니다. 연초부터 저희 회사에는 확진자가 발생하여 전원이 자가격리 상태에 들어갔어요. 지난 동안 재택근무를 하긴 했지만 격일로 출퇴근을 해왔던 터라 답답함을 느낄 새가 없었는데, 이렇게 연일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모호해져서 업무시간이 엉망이 되었어요. 한 해의 시작이 이렇게 줄은 몰랐죠. 지난 코로나19 이렇게 오래갈 아무도 몰랐듯이요. 며칠 , 친구들과 만다라트*라는 해봤어요. 제가 올해의 시작과 함께 세운 목표는 다시 독서를 주기적으로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고, 하나는 그림을 하루에 한 점씩 그리고 이 기록을 모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 것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이렇게 정수님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로 새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덕분에 벌써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지난해 함께 신년 계획을 세우면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저는 새해 계획을 세우는 그리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갑자기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새로운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해가 어제의 해나 내일의 해와 다를 없는데 유난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사람이었죠.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유난을 떠는 즐거운 일이란 알게 되었어요. 정수님과 함께하면서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상하게도 전과 같은 거부감이 들지 않아요. 아마 지금까지의 나를 저도 제법 바꾸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정수님의 추천을 받아 새로 상담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제가 살면서 가장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정수님은 제게 많은 변화를 주었네요.

 

    새해의 시작은 격리였지만, 지난해의 끝은 저도 기나긴 잠이었어요. 자도 자도 계속 졸려서 게임을 하는 옆에서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 만큼 너무 졸렸어요. 이렇게 오래 자다 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있어요. 혹시 아오이 유우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시리즈 <아오이 유우의 네 개의 거짓말> 보신 있나요? 3화씩 각기 다른 감독들이 만드는 옴니버스식 드라마에요. 그중 제가 제일 좋아했던 이야기는 연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죽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계속 잠에 빠져드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요. 꿈속에선 어디든 있으니까 평소에 가고 싶었던 식당에도 가요. 그런데 꿈이니까 맛을 느끼는 거예요. 꿈속은 계속 환한데, 어두컴컴한 방에서 잠깐 깨어나길 반복해요. 여자는 다시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연거푸 삼키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제가 이야기를 보면서 공감했던 그녀가 느꼈던 상실이라기보단 무기력증이었던 같아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꿈속에 있고 싶은 느낌이요.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니까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요. 올해의 마지막은 잠에 빠져 있긴 했으나, 다행히도 무기력 때문은 아니었어요. 아마 동안에 쌓인 피로로 인해 긴장의 끈이 풀린 탓일 같아요. 정수님도 고단한 해를 보낸 탓이겠죠? 잠에만 빠져들었던 스스로를 너무 탓하지 않았으면 해요.

 

    지난 세운 새해 계획 하나는 지킨 같아요. 나를 위해 무언갈 사들이는 일에 죄책감 느끼지 않기요. 위한다는 것에는 필요도 포함되어 있는데, 탓에 저는 생활필수품을 사는 일도 그리 쉽지 않았거든요. 문제는 엉뚱한 소비를 하게 된다는 건데, 작년엔 생활필수품을 착착 샀던 같아요. 휴지라든가, 주방세제, 고무장갑 같은 것들이요. 그런 것들을 미리미리 사놓으려면 생활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엔 나름의 여유와 계획이 필요하거든요. 저는 그래요. 그래도 작년엔 일상을 돌봤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만큼은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어요. 올해 우리가 하기로 , 스스로 칭찬하고 대견해하기.

 

    문득 고민이 들어요. 정수님과 매달 주제를 정하고 편지를 나누기로 했고, 우리의 편지를 게재하기로 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질 있을까. 이렇게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누구에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기획을 하게 계기를 생각해보면, 요즘 제가 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책이 계기인 같아요. 아닌 누군가의 일상과 생각이 나에게로 왔을 , 그래서 일상 속에서 지나쳐버리는 아주 작은 것들을 다른 누군가의 속에서 발견할 때의 안도감. 저는 우리의 편지가 누군가에게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삼십 년 뒤가 어떤 모습일지는 몰라도, 정수님과 투덕대며 여전히 함께하고 있기를 바라요.

 

은수 드림

 

P.S. 어제 민주당에서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분에게 사과했다고 하네요.

정말 반성한다기보다 재보궐 선거 때문에 빨리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은 거겠죠. 누구 맘대로?

 

 

illust eunsoo

 

 


 *만다라트란? 일본의 디자이너 이마이즈미 히로아키(今泉浩晃)가 개발한 발상기법으로 최근 계획을 세우는 데에 활용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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